민족발생론과 파시오나르노스트 이론으로 유라시아주의를 재창조한 역사학자
“나는 러시아인이지만, 평생 타타르인들을 비방으로부터 지켜왔다” — 카잔의 구밀료프 흉상 받침대에 새겨진 문구.
소련의 역사학자·민족학자·고고학자로, 민족 집단의 발생과 쇠퇴를 우주적 에너지 '파시오나르노스트'로 설명하는 민족발생론을 제창했다.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안나 아흐마토바의 아들로,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세 차례 체포되어 14년간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베를린 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저작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폭발적 인기를 얻어 중앙아시아와 타타르스탄에서 민족 정체성 담론의 기초가 되었고, 카자흐스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구밀료프 유라시아 국립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계에서는 유사과학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정치 엘리트의 유라시아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4레닌그라드 대학교 역사학부 입학
- 1938–1943노릴스크 수용소 복역 (1차 수감)
- 1944–1945붉은 군대 복무, 베를린 전투 참전
- 1948역사학 후보학위 취득
- 1949–1956카자흐스탄·알타이·시베리아 수용소 복역 (2차 수감)
- 1956–1962에르미타주 박물관 연구원
- 1961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62–1987레닌그라드 대학교 지리학부 연구원
관련 역사 사건
전후 연구 경력과 민족발생론의 전개
1945년 11월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구밀료프는 대학에서 졸업시험을 마치고 투유크마자르 출토 전사상에 관한 논문으로 역사학자·동양학자 자격을 얻었다. 1946~1949년 남부 포돌리예와 고르노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발굴에 참여했고, 1948년 제1튀르크 카간국의 정치사에 관한 후보학위 논문을 변론했다. 그러나 1949년 다시 체포되어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여러 수용소에서 복역했다. 1956년 석방·복권된 뒤 에르미타주와 중앙과학도서관에서 일했고, 1957~1962년 에르미타주 아스트라한 고고학 조사단을 이끌었다. 저서 『훈누』(1960)를 토대로 1961년 고대 튀르크에 관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 레닌그라드대학교 지리경제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역사 지리학과 인구 지리를 강의하고, 이후 민족지리와 민족 집단의 역사적 형성을 다루는 강좌를 마련했다. 1966년 「민족과 경관」을 발표하며 민족 집단과 지리적 환경의 관계를 연구 의제로 제시했다. 1974년 「민족발생과 지구의 생물권」으로 지리학 박사학위 심사를 받았으나, 대학 학술위원회의 승인에도 소련 고등학위위원회는 학위를 공식 승인하지 않았다. 이 저작은 그의 민족발생론과 생물권 개념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