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서 연방회의 의장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의 공보 엘리트이자 최고 입법기관의 얼굴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잡자, 톨쿠노프는 한때 중앙위에서 함께 일했던 그에게 신문 복귀를 요청했다. 안드로포프는 『프라우다』를 제안했지만 톨쿠노프는 『이즈베스티야』를 택했다.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프라우다』 기자로 출발한 소련의 언론인·국가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특파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고, 1960년대 초부터 CPSU 중앙위원회 사회주의국가연락부에서 근무하며 당의 대외 선전 라인을 관리했다. 1965년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에 취임해 11년간 신문을 이끌었고, 1976년 노보스티 통신사 사장으로 전출된 뒤 1983년 안드로포프 집권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로 복귀했다. 1984년 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8년까지 재임하며 입법부의 제도적 수장 역할을 수행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8–1939 이념·선전 · 소련 · 이념 · 선전
경력 연표
- 1938–1939『프라우다』 정보부 기자 → 문예담당, 주필 보좌관
- 1941–1944전쟁 특파원 (칼리닌·북서·브랸스크·제4우크라이나·제2벨로루시 전선)
- 1946–1947, 1951–1957『프라우다』 근무
- 1957–1965CPSU 중앙위 기구 → 사회주의국가 공산·노동자당 연락부 차장·제1차장
- 1965–1976『이즈베스티야』 편집장
- 1976–1983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3–1984『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재임)
- 1984–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관련 역사 사건
검열 아래의 편집장: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톨쿠노프의 『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재임(1965~1976)은 브레즈네프 시기 검열과 당 간섭 속에서 언론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국면이다. 그가 취임할 무렵 편집국은 흐루시초프 축출과 함께 전임 편집장 알렉세이 아주베이가 해임된 직후였고, 상대적 자유를 맛보았던 기자들은 인사 숙청을 예상하며 새 편집장을 경계했다. 그러나 톨쿠노프는 취재진의 창의성과 개성을 장려하면서도 모든 지면의 단어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편집장으로 기억된다. 논란이 될 만한 기사를 두고는 상부의 압력과 충돌하면서도 게재를 밀어붙였고, 당 고위 기관의 비판에 맞서 기자를 감쌌다. 그의 재임 기간에 알렉산드르 보빈처럼 당 관리들의 미움을 산 국제 문제 전문 기자들이 신문에 합류한 것도 이 기풍과 맞물린다.
가장 첨예한 사례는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입이다. 『이즈베스티야』의 프라하 특파원과 파견 특파원은 진입한 소련군을 체코슬로바키아 인민이 환영했다는 취지의 기사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특파원 블라들렌 크리보셰예프의 회고에 따르면, 톨쿠노프는 부편집장을 프라하로 보내 현지 상황을 직접 확인하게 했고, 보고를 받은 뒤 그에게 "조용히 일하라"고 지시하며 취재를 계속하게 했다. 이후 크리보셰예프는 편집국 부속 매체로 옮겨졌고 결국 신문사를 떠났는데, 그 무렵 한 기자가 중앙위원회에 톨쿠노프가 '반소적' 언론인들을 감쌌다는 내용의 밀고를 했다고 한다. 당시 편집국 동료였던 레오니드 카미닌의 회고에서도 톨쿠노프는 "그 사건이 너무 이례적이어서 내적 위기를 겪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며 해당 기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다른 일자리를 찾을 시간을 주는 방식으로 사태를 무마했다고 전한다. 이는 그가 요구된 보도를 강제하지도, 기자를 희생시키지도 않은 채 위험한 선에서 균형을 잡았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일화들은 참여자와 동료의 회고 및 기념 기사에 근거한 것으로, 편집장의 판단과 동기를 사료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