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재능 있던 전선군 사령관, 그러나 원수는 아니었다
1941년 8월 29일,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타전했다. 「누군가 이 구역에서 일부러 독일군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 아닌가? 포포프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놈인가?」 황제의 의심은 3년 뒤 강등으로 이어졌다.
돈 강 유역 출신으로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했다. 독소전 초기 북부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해 독일군 진격을 저지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부사령관으로 포위 작전을 입안했다. 1943년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오룔과 브랸스크를 해방해 육군대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발트에서의 부진과 정치위원 불가닌과의 충돌로 상장으로 강등되었다. 1956년부터 지상군 주참모장을 지냈고 196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바실렙스키와 골로바노프가 최고의 재능이라 평가했지만 끝내 원수가 되지 못한 대표적 장군이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39–41제1독립적기군 사령관(극동)
- 1941.1–6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41.6–9북부전선군·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1941.12–42.6제61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
- 1942.10–12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제5충격군 사령관
- 1943.6–10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오룔·브랸스크 해방, 육군대장 진급
- 1943.10–44.4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 — 작전 부진으로 상장 강등
- 1944–45레닌그라드 전선군 참모장
- 1955–62지상군 전투훈련총국장, 이후 주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관련 역사 사건
브랸스크의 승리와 발트의 강등
포포프가 사령관으로서 최고의 시간을 보낸 곳은 1943년 여름의 브랸스크 전선군이었다. 쿠르스크 반격의 일부인 오룔 작전에서 그의 부대는 8월 5일 오룔을 해방했고, 이날 오룔과 벨고로드의 해방을 기념해 모스크바에서 전쟁 중 처음으로 축포가 발사되었다. 이어진 브랸스크 공세 작전에서 포포프는 정규 교범을 벗어나는 구상을 제안하고 관철했다. 인접한 서부전선군의 구역에서 돌파구를 연 다음, 기동 집단을 투입해 적의 방어선을 옆으로 잘라내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진격으로 브랸스크와 베지차를 해방하고 소시·데스나 강을 도하해 벨로루시로 돌입했다. 돌이킬 수 없는 손실 1만 3천여 명은 비슷한 규모의 소련군 작전 가운데 가장 적은 축에 들었다. 이 공로로 포포프는 1943년 8월 26일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넉 달 뒤 운명은 반전했다. 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14차례의 군·전선군 작전을 수행했으나 독일군 '판터'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1944년 3월 작전에서는 적의 철수를 적시에 발견하지 못해 추격이 느슨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4년 4월 20일 국방위원회 결정 제5689сс호는 그를 강등시켜 상장으로 격하했다. 결정문은 전선군 사령부가 '교만해져 자신의 결점에 비판적이지 않고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적었다. 전기 작가 스미슬로프는 강등의 진짜 원인이 작전 부진이 아니라 총참모부 제1차장 안토노프와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불가닌과의 갈등에 있었다고 보았다. 포포프는 해임 직후 레닌그라드 전선군 참모장으로 이동해 카렐리야 지협 작전 계획을 맡아 '아름다운 작전이 될 것'이라며 전의를 보였다. 그는 1944년 전쟁 중 유일하게 육군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당했다가 재진급한 고위 지휘관으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