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지 이후 농정을 맡은 농업장관
1955년 아이오와 농장 시찰, 더위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장관이 현지식으로 응수했다: "그래도 옥수수엔 아주 좋은 날씨."
우크라이나 출신 축산기술자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장관을 두 차례 맡았다. 처녀지 개간을 주관했으나 이후 현장으로 좌천되었고, 복권 후 1972년 미국과의 대규모 곡물 거래를 성사시켰다.
경력 연표
- 1955–1960, 1965–1973농업장관 · 처녀지 이후 농정
축산기술자에서 소련 농업장관까지
블라디미르 마츠케비치는 1909년 12월 14일 예카테리노슬라프현 프리볼노예 마을(현재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 프리드니프롭스케)에서 농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2년 하리코프 축산기술대학(Харьковский зоотехн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을 졸업한 후, 그는 교육자로서 경력을 시작해 리프쿠바톱스키 농업전문학교 부교장(1932~1946), 마리우폴·도네츠크 국영농장-전문학교 교장(1933~1938), 그리고 모교인 하리코프 축산기술대학 교장(1938~1941)을 역임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학술기관들이 대피하면서 마츠케비치는 시베리아 톰스크로 옮겨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톰스크 축산수의학전문학교 교장을 지냈다. 1944년 우크라이나가 해방되자 그는 하리코프로 돌아와 하리코프 축산수의학연구소 소장(1944~1946)으로 복귀했다.
1946년 마츠케비치는 본격적으로 정부 관료의 길로 들어서 우크라이나 공화국 축산부 제1차관(1946~1947), 축산부 장관(1947년 1~2월), 농업부 차관(1947~1949), 농업부 장관(1949~1950)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1950~1952)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1952년 스타브로폴 변경주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겸 위원장 대행이라는 변방 보직으로 밀려나며 일시 후퇴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마츠케비치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소련 농업조달부 제1차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소련 농업부 제1차관(1953~1955)을 거쳐 1955년 10월, 니콜라이 불가닌 내각의 농업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하리코프의 한 축산기술자가 소련 전역의 농업정책을 총괄하는 자리까지 오르는 데 23년이 걸린 셈이었다.
1955년 아이오와 시찰과 옥수수 외교
1955년 2월, 〈디모인 레지스터〉의 편집자 로렌 소스는 사설 「러시아인이 더 많은 고기를 원한다면…」을 통해 "농업에는 비밀이 없다. 와서 우리의 성과를 나누자"고 흐루쇼프를 초청했다. 흐루쇼프는 이 제안에 즉각 응답해 농업장관 대행이었던 마츠케비치에게 최고의 과학자들을 이끌고 아이오와로 가라고 지시했다. 1955년 7월, 마츠케비치가 이끈 12명의 대표단은 2주간 아이오와의 농장과 사료 시설을 시찰했다. 첫 방문지는 슬레이터 인근의 앨러먼 가족 농장이었고, 하이브리드 옥수수 종자로 명성을 쌓은 로스웰 가스트의 농장도 둘러보았다. 귀국 후 마츠케비치는 40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흐루쇼프는 이를 탐독하며 하이브리드 종자와 곡물 등급시설을 소련에 도입해야 할 핵심 기술로 낙점했다. 이 보고서는 흐루쇼프의 옥수수 캠페인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고, 가스트는 이후 모스크바를 방문해 흐루쇼프와 개인적 우정을 쌓으며 냉전기 농업 교류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마츠케비치는 1971년 농업장관으로 재임명된 후 다시 앨러먼 농장을 찾아 16년 만에 재회했다. 소스는 이 사설로 1956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처녀지로의 좌천과 복귀
1960년 12월, 마츠케비치는 수확 실패와 '관리 부실'의 책임을 지고 농업장관에서 해임되었다. 후임으로는 미하일 올샨스키가 임명되었고, 마츠케비치는 카자흐스탄 북부의 다섯 개 주를 통합해 신설된 첼리니 크라이(처녀지 변경구)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좌천되었다. 이는 아이러니한 인사였다.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사업을 장관으로서 주관했던 그가, 이제는 그 사업의 현장 책임자로 내려가 성과를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라디오는 마츠케비치가 처녀지에서 '자신의 역량을 입증할 기회'를 얻었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실질적인 강등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4년 넘게 근무하며 흐루쇼프의 농업 실험 최일선을 관리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실각하자 정치 지형이 바뀌었다. 1965년 2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의 새 지도부는 마츠케비치를 다시 농업장관으로 임명하며 복권시켰다. 그는 이후 8년간 재임하며 1971년 12월에는 미국을 방문해 얼 버츠 농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대규모 곡물 거래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1972년의 참담한 흉작으로 소련이 사상 초유의 곡물 대량 수입에 의존하게 되자, 1973년 2월 마츠케비치는 또다시 해임되었다. 〈타임〉지는 그를 '두 번 패배한 자(a two-time loser)'라고 평했다. 이후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어 1980년까지 외교관으로 경력을 마감했다.
1972년 미-소 곡물 거래
마츠케비치의 두 번째 농업장관 임기 중 가장 큰 유산은 1972년 획기적인 미-소 곡물 거래였다. 1971년 12월, 그는 미국을 방문해 얼 버츠 농무장관과 첫 고위급 회담을 가졌고, 이는 본격적인 협상의 물꼬를 텄다. 이듬해 4월, 모스크바에서 버츠와 마츠케비치가 이끄는 양국 대표단이 신용 한도와 구매 조건을 놓고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미국 측은 닉슨 행정부의 데탕트 전략 아래 곡물을 평화적 교역의 지렛대로 삼고자 했고, 소련 측은 1972년 여름 극심한 한발과 동해로 밀 수확이 급감한 현실을 숨긴 채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려 했다.
1972년 7월 8일, 헨리 키신저가 샌클레멘테의 '서부 백악관'에서 이 역사적인 합의를 발표했다. 3년간 7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신용으로 소련이 미국 곡물을 구매할 수 있게 한 이 협정은 냉전 시기 양국 간 최대 단일 무역 계약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한 달 만에 신용 한도를 모두 소진했고, 결국 약 4억 4천만 부셸의 밀(약 7억 달러 상당)을 포함한 총 10억 달러 이상의 곡물을 미국에서 구매했다. 이는 미국 연간 밀 수출 총량을 넘는 규모였다. 소련이 자국의 작황 실패를 은폐한 채 막대한 양을 저가에 사들인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 언론은 이 사건을 '대곡물강탈(Great Grain Robbery)'이라 불렀고, 글로벌 곡물 가격은 1973년 한 해에만 최대 50% 폭등했다. 이 거래는 소련이 이후 냉전 내내 미국산 곡물에 구조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마츠케비치에게 이 성사는 마지막 큰일이었다. 1972년 소련의 참담한 수확으로 막대한 수입이 불가피해지자, 1973년 2월 그는 또다시 해임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전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