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시대의 군사 전략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그는 군사 선택지를 설명한 뒤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2미 육군 공병 소위
- 1942–1945제82공수사단 포병 지휘관, 제101공수사단장
- 1949–1951서베를린 주둔 연합군 사령관
- 1953–1955제8군 사령관, 육군참모차장
- 1955–1959미 육군참모총장
- 1961–1962대통령 군사대표
- 1962–1964합동참모본부 의장, EXCOMM 위원
- 1964–1965주베트남 미국 대사
관련 역사 사건
펜토믹 사단 개편: 참모총장 시기의 군 개혁
맥스웰 테일러가 1955년 7월 미국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했을 때,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은 군사 예산의 대부분을 공군과 해군에 배분하고 육군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 테일러는 이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전술핵무기가 쓰일 수 있는 전장에 맞춰 육군 자체를 재편하는 작업을 밀어붙였다. 그가 설계한 ‘펜토믹’ 편성은 사단을 다섯 개의 전투단으로 나누고, 각 전투단 아래에 다시 다섯 개의 전투중대를 두는 방식이었다. 목표는 공격을 조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여 적이 핵 타격으로 대응할 여지를 좁히는 데 있었다.
첫 시험 대상은 테일러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지휘했던 101공수사단이었다. 1956년 8월 공수사단 개편안(ROTAD) 시험 편성이 나온 뒤 1957년에 11·82·101공수사단이 재편되었고, 이어 육군의 9개 보병사단도 1957년 안에 새 편성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 개편은 처음부터 논란을 안고 있었다. 지휘 폭이 지나치게 넓어졌고, 중대와 연대 사이의 대대급 지휘 단계가 사라졌으며, 오랜 역사를 지닌 연대의 결속이 약화되었다. 야전 장교들은 이 계획을 “출발도 잘못되고 운명도 기구하며 되도록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평했고, 일부는 전투 병력을 줄이면서 현역 사단 수를 늘리려는 테일러의 속셈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편성 자체가 참모총장의 작품이었기에, 웨스트모어랜드가 훗날 회고했듯 경력을 중시하는 장교라면 누구도 쉽게 비판하지 못했다. 1960년 101공수사단 지휘를 마친 웨스트모어랜드는 펜토믹 편성의 폐지를 건의했고, 같은 해 12월 육군은 케네디 행정부의 ‘유연한 대응’ 독트린에 맞춘 새 개편안 연구에 들어가 1963년까지 ROAD 편성으로 전환했다. 테일러가 뉴 룩에 맞서 제시한 육군 개혁은 그 자신이 진단한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짧은 수명을 마감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