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마다가스카르 학생운동을 이끈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
1972년 4월 24일부터 1960년 협력협정 폐기와 말가시화를 ‘제2의 독립’으로 내걸었으나 1972~1975년 군정은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란자노로는 이를 ‘제3의 독립’으로 부르며, FAEM 사무총장직을 둘러싼 사료도 엇갈린다.
마다가스카르에서 태어나 자란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다. 정치를 남성의 영역으로 여긴 소시민 가정 출신으로, 학생기독교운동(SCM-MPIKRIMA)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정치화되었다. 1972년 마다가스카르 문학·언어학과 3학년이던 그는 FAEM 사무총장으로 4월 24일 시작된 전국 학생운동을 이끌며 1960년 협력협정 폐기와 말가시화를 ‘제2의 독립’으로 내걸었고, 5월 12일 밤 체포되어 노시라바에 수감되었다. 나이로비에서 WSCF ‘해방’ 프로그램을 맡았고, 1975년 제네바를 거쳐 1978년 나이로비로 돌아왔으며 남편 체포·석방 뒤 캐나다로 건너갔다. 1991년 영국으로 이주해 유엔여성기금(UNIFEM) 아프리카 부서장을 지내며 2010년 퇴직했다.
다른 이름: 미셸린 라볼로논아리소아 · 미슈 바비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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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마다가스카르 학생협회연맹사무총장대표
사회운동·조직
경력 연표
- 1972마다가스카르 문학·언어학과 3학년, FAEM 사무총장, 파업위원회 위원
- 19725월 12일 밤 체포되어 노시라바에 수감
- 1972 이후나이로비 WSCF 아프리카 지역사무소 프로그램 담당자로 ‘해방’ 프로그램 지도, 세계교회협의회 인종차별 반대 프로그램 위원, 개발협력연구기구 설립 및 서아프리카 담당
- 1975–1991제네바를 거쳐 1978년 나이로비로 복귀, 캐나다에서 여성학 대학원 수학 및 프랑스어 강의 후 영국으로 이주
- 2010유엔여성기금(UNIFEM) 아프리카 부서장(Head of the Africa section)으로 퇴직, 이후 독립 전문 컨설턴트로 활동
관련 역사 사건
FAEM 지도부에서 유엔까지: 여성 문제와 페미니즘 방법론
라볼로나리소아는 1972년 FAEM 사무총장이었지만, 그 지도부 안에서 여성들은 서류를 타자·복사·배포하는 ‘비서’ 역할을 맡거나 남성 간부의 연인으로 취급되기를 요구받았다. 여성은 사회과학·법학부 출신, 남성은 경제·의학·자연과학부 출신이라는 구성도 이 위계를 굳혔다. 그녀는 15명가량의 남성 간부에 맞선 4명의 여성 집행부 일원으로서 ‘가구처럼 놓여 있기’를 거부하고 교사·교회 지도자·공무원·노동조합을 설득하는 일을 맡았으나, ‘수탉인 척 우는 암탉’이라는 조소와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는 이 경험을 ‘가부장제에 대한 나의 저항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이후 농민조직·노조·정부기관에서도 같은 배제를 발견한 그녀는 분노와 저항만으로는 변화가 오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러, 잘 조사된 논증을 갖추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나이로비에서 WSCF 프로그램을 맡던 시절 여러 아프리카 국가를 다니며 여성의 처지가 유사함을 확인하고, 여성 스스로 비전과 목표를 정하는 조직화를 해법으로 삼았다. 그 연장선에서 유엔여성기금(UNIFEM) 아프리카 부서장으로 네 개 사하라 이남 지역의 정책을 총괄했고, 유엔을 ‘여러 층위의 권력이 자리한 거대한 관료조직’으로, 그 안에서 ‘돈을 대는 쪽이 곡조를 정한다’고 평가했다. ‘여성 문제’가 국가의 ‘딱딱한’ 정치에 들지 않는다는 점, 유럽중심적 아프리카 담론이 협상을 어렵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성과의 원천이 아니라 변화의 촉매로 규정했다. 그녀에게 페미니즘은 이데올로기이자 분석·전략의 틀이며 일상 실천의 지침으로, 평등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권력관계, 특히 젠더 권력관계를 변혁하는 과업이며, 그 지향은 사회주의가 주창하는 공정하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