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라이벌: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이자 제1인터내셔널 분열의 중심
1869년 바젤 대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혁명가도 절대 권력을 쥐면 1년 안에 차르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국가와 무정부』
트베리 귀족 출신,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하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축출되었고, 『국가와 무정부』(1873)로 무국가 연방주의를 체계화했다.
경력 연표
- 1829–1835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 소위 임관 후 상관 모독으로 면직, 모스크바 스탄케비치 서클 합류
- 1840–1842베를린 대학 — 헤겔 좌파 합류, 가명 쥘 엘리자르로 「독일에서의 반동」 발표
- 1843–1847파리·브뤼셀 — 프루동·마르크스와 교류, 폴란드 독립 연설로 프랑스 추방
- 1848–1849프라하 범슬라브 대회, 프라하·드레스덴 봉기 지도 — 작센·오스트리아 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851–1861러시아 송환 — 페트로파블롭스크·슐리셀부르크 6년, 시베리아 유형 후 일본·미국 경유 탈출
- 1861–1864런던 망명 — 게르첸 『콜로콜』 편집 참여, 폴란드 봉기(1863) 지원 원정 실패
- 1864–1868이탈리아 —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결성, 『혁명적 카테키즘』(1865–66) 집필, 국제형제단 창설
- 1868–1872제1인터내셔널 가입,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 조직 — 마르크스와 투쟁, 1872년 헤이그 대회 축출
- 1872–1876루가노·로카르노 — 『국가와 무정부』(1873), 미완성 『신과 국가』 집필, 베른에서 병사
네차예프 사건: 혁명적 광신주의와 바쿠닌의 위기
1869년 봄, 제네바 망명 중이던 바쿠닌은 러시아에서 온 젊은 혁명가 세르게이 네차예프를 만나 '내 아들'이라 부르며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네차예프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탈출자라고 사칭하고 있었고, 바쿠닌은 그에게서 '세계에서 가장 혁명적인' 러시아 청년 세대의 진정한 목소리를 보았다. 두 사람은 오가료프의 바흐메티예프 기금으로 러시아 내 선전물 배포 캠페인을 펼쳤다. 네차예프가 쓴 『혁명가의 교리문답』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 아래 혁명가는 사적 이익·감정·재산·이름마저 버린 '파멸의 인간'이어야 한다고 선언했고, 이 선언은 이후 오랫동안 바쿠닌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졌다.
1869년 11월 네차예프는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비밀결사 '인민보복회'에 이의를 제기한 동료 이바노프를 구타·교살·사살한 뒤 얼음 밑 호수에 유기했다. 이 살인 사건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의 소재가 되었다. 제네바로 도피한 네차예프는 이후 바쿠닌과 오가료프의 편지까지 훔쳐 협박 자산으로 삼는 등 배신 행각을 벌였고, 바쿠닌은 그에게 '예수회에 더 가깝다'며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타격은 돌이킬 수 없었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마르크스파는 네차예프 사건과 바쿠닌의 비밀결사 '국제형제단'을 인터내셔널 제명의 핵심 근거로 제출했다. 네차예프 사건은 목적을 위한 무제한적 수단을 거부하는 아나키즘 윤리와 혁명적 마키아벨리즘 사이의 긴장을 극명하게 드러낸 역사적 시금석으로 남았다.
마르크스-바쿠닌 분열: 국가, 상속, 그리고 혁명의 방향
제1인터내셔널을 두 동강 낸 마르크스-바쿠닌 대립의 핵심은 '혁명 이후 무엇으로 대체하는가'였다. 바쿠닌은 프루동의 연방주의와 자신의 집산주의를 결합해 토지·생산수단의 집단 소유와 노동자 자치 공동체의 자유로운 아래로부터의 연방을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사유재산 폐지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본 상속권 문제를, 바쿠닌은 계급 불평등을 영속화하는 법적 장치로 간주하고 즉각적 전면 폐지를 요구했다. 1869년 바젤 대회에서 바쿠닌의 상속권 폐지안은 32 대 23으로 필요한 과반에 미달했으나, 마르크스가 지지한 일반평의회의 상속세 인상안은 19 대 37로 더 큰 차이로 부결되며 바쿠닌 측의 상징적 승리로 기록되었다.
더 깊은 쟁점은 국가 권력이었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적 불가피한 단계로 본 반면, 바쿠닌은 「국가와 무정부」(1873)에서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인민국가는 본질적으로 인민을 통치하는 소수 특권층의 독재에 불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국가 권력이 어떤 이념으로 포장되든 그 자체로 새로운 지배계급을 재생산한다고 보았고, 혁명은 국가 장악이 아니라 국가 해체와 자치 공동체 연방으로 직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직 원리에서도 마르크스파가 규율 있는 정당을 통한 정치투쟁을 중시한 데 맞서, 바쿠닌은 노동자·농민의 직접행동과 인터내셔널 내 섹션들의 자율적 연방제를 옹호했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바쿠닌은 네차예프 사건과 비밀결사 '국제형제단' 조직을 이유로 제명되었고, 이는 인터내셔널의 해체로 이어졌다. 이 분열은 이후 모든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운동의 계보를 가르는 원형적 균열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