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티모페예비치 칼라시니코프

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Калашников
소련 러시아 1919–2013 ○ 자연사

소련 방위산업의 얼굴이 된 총기 설계자, AK-47의 아버지

죽기 6개월 전 총대주교에게 보낸 편지: "내 소총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정교회 신자요 기독교인인 나에게 그 죽음들의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소련의 대표적 소형화기 설계자. 쿨라크로 몰려 추방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한 칼라시니코프는, 신뢰성 없는 소총에 좌절한 병사들의 불만을 AK-47로 응답했다. 1949년 채택된 AK는 AKM, RPK, PK, AK-74로 이어지며 단순성과 저비용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보병 화기가 되었다. 이젭스크 기계공장에서 평생을 보내며 상사에서 중장까지 진급했고 여섯 차례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한 소련 군수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으나 발명으로 부를 얻지는 못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무기가 초래한 죽음에 대한 영적 고통을 총대주교에게 고백하면서도 AK는 방어의 무기라고 주장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AK-47까지의 설계 경로, 1942~1949

칼라시니코프가 AK-47에 이르는 과정은 한 번의 착상이 아니라 여러 차례 탈락한 시안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였다. 1941년 10월 브랸스크 근교에서 어깨에 중상을 입고 후송된 그는 야전병원에서 동료 병사들이 자기 소총의 고장과 걸림을 성토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동화기를 직접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의사들의 권고로 6개월 요양 휴가를 받아 돌아간 마타이 역 기지에서 3개월 만에 첫 기관단총 시제품을 완성했고, 알마아타로 파견되어 보다 나은 시안을 다시 만들었다. 시제품은 포병총국(ГАУ) 관계자와 화기 학자 아나톨리 블라고니라보프에게 제출되었는데, 블라고니라보프의 평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면서도 설계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그를 추가 교육에 보낼 것을 권했다. 1942년부터 그는 붉은군대 포병총국 중앙사격시험장에 배속되어 설계 작업을 이어 갔으나, 이 첫 기관단총은 채택되지 않았다.

1944년에는 새 중간탄 7,62×39mm용 가스작동식 자동카빈을 설계했으나 시모노프 카빈에 밀려 SKS가 제식으로 채택되었고, 1943년에 만든 7,62×54mm 기관총도 제식이 되지 못했다. 결국 1946년 신형 자동소총 선발 시험이 그의 경로를 바꾸었다. 당시 그는 이름과 부칭의 머리글자를 딴 '미흐팀'이라는 별칭으로 시험에 올랐고, 첫 단계에서 유명 경쟁자들의 시안을 앞섰으나 2차 단계 뒤 설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손봐야 했다. 이렇게 완성된 것이 1947년의 AK-47이다. 1948년 3월 포병원수 니콜라이 보로노프의 지시로 이젭스크 모토자보드에 파견된 그는 기술문서 작성과 시제품 생산을 맡아 단기간에 1,500정을 만들어 냈고, 이 물량은 부대 시험을 통과했다. 1949년 소련군 제식 화기가 되었고 같은 해 스탈린상 1급이 그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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