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라브렌티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Лавренть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시베리아에 아카뎀고로도크를 세운 수학자이자 폭발물 응용의 개척자

대학생들 앞에서 푸앵카레가 항해 과목을 면제받은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도 몇 과목은 면제해줘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강의실 전체가 "공산당사!"를 외쳤다.

소련 수학자·유체역학자로서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원의 창립 의장을 지내며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했다. 준등각사상 이론과 유체역학에서 근본적 성과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발 물리학 연구로 성형작약탄 이론에 기여했으며 이후 통제폭파를 건설에 응용하는 분야를 개척했다. 1953~1955년 아르자마스-16 핵무기 연구소의 부과학책임자를 맡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소련 최초의 전자계산기 개발과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과학의 동진(東進)을 상징하는 인물로, 20개 연구소와 대학이 하나의 숲속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현실화한 과학 행정가였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아카뎀고로도크 건설과 '라브렌티예프의 삼각형'

라브렌티예프의 생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업적은 시베리아에 새 과학 중심지를 세운 일이다. 그는 세르게이 소볼레프, 세르게이 흐리스티아노비치와 함께 시베리아에 여러 분야의 연구소를 묶은 대형 과학 단지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이 구상은 과학계의 폭넓은 호응을 얻어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시베리아로 가겠다고 나섰다. 1957년 5월 18일 소련 각료회의는 시베리아와 극동의 생산력 발전을 위해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고, 라브렌티예프가 이끄는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같은 해 5월 분원 의장에 오른 그는 1975년 11월 25일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건설은 1958년에 시작되어 이듬해 첫 연구소와 주택이 들어섰고, 가장 먼저 완공된 것은 유체역학연구소였다. 1958년 10월 17일 각료회의 결정으로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이 세워져 1959년 9월 29일 개강했으며, 라브렌티예프는 1960년부터 이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는 연구소들의 연구와 대학의 교육, 그리고 성과의 산업적 적용을 맞물려 돌리는 구상을 밀어붙였는데, 이는 뒤에 '라브렌티예프의 삼각형'으로 불리게 된다. 자연을 최대한 살린다는 원칙 아래 숲을 남겨 두고 지은 이 단지는 1967년 무렵 학자 11명, 통신회원 40명, 박사 125명, 후보 과학자 약 1400명을 품은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베리아 시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세르게이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바이칼 펄프·제지 공장 건설을 두고 흐루쇼프와 맞섰는데, 값싼 종이가 필요하다는 논리에 밀려 이해를 얻지 못했다. 만년에는 영화감독 라이사 예르나자로바의 회고처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지방당의 견제를 계속 넘어야 했다. 그는 1980년 10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고, 노보시비르스크 남부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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