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에게 바나나 때문에 해임되고 흐루쇼프 아래 냉전 대사로 복귀한 무역·외교 관료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6–1949 외교·국제활동 · 소련 · 외교
경력 연표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 1921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참여
- 1930–1936아르코스(ARCOS) 런던 지부 책임자
- 1943–1946유엔구제부흥기구(UNRRA) 부국장 (미국)
- 1946–1949소련 대외무역부 차관
- 1949–1951소련 대외무역부 장관
- 1953–1957주인도 소련 대사
- 1957주네팔 소련 대사 (겸임)
- 1958–1962주미 소련 대사
- 1962–1968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
워싱턴 대사와 정상회담 구상
멘시코프는 인도 대사에 이어 1958년 2월 11일 워싱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소련 대사로 부임했다. 신임장 제정 때 두 사람은 미소 간 긴장 완화와 정상회담 가능성을 논의했다. 멘시코프는 지도자 회담을 희망한다고 전하면서, 하급 수준의 협상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경험 때문에 소련 지도부가 그런 회담을 중시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양국 간 접촉을 늘리고 자신이 대통령을 수시로 만나 입장을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정상회담 전에 실무적으로 쟁점을 다듬어야 한다고 답했다.
1959년 7월 부총리 프로코피 코즐로프의 미국 방문 중 멘시코프는 닉슨 부통령 및 국무부 관리들과의 면담에 동석하고, 코즐로프와 미 국무부 유럽 담당 차관보 리빙스턴 머천트의 공항 대화에도 합류했다. 면담 기록에서 양측은 무역 확대를 논의했다. 코즐로프는 미국의 화학·자동화·방직 기계에 대한 소련의 관심과 수출 허가 문제를 제기했고, 미국 측은 특허 보호와 양국 경제체제 차이를 언급했다. 코즐로프는 소련의 인도 기술 지원을 평화공존의 사례로 제시하며, 인도에 대한 영토적·정치적 요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코즐로프의 설명이며, 멘시코프가 해당 정책을 직접 결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멘시코프는 1962년 아나톨리 도브리닌으로 교체될 때까지 워싱턴에서 대사직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