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소비에트 정부의 제도적 기억이 된, 폴리트뷰로 밖의 실세
1979년, 70세의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올라갔지만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 중앙위 대립의 주요 인물'이라며 질질 끌었다. 코시긴이 폴리트뷰로에 직접 상정했고 티호노프와 셰르비츠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1930년 스물한 살로 인민위원회의 기구에 들어가 1990년까지 60년간 크렘린에 몸담은, 소비에트 정부기구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미코얀의 보좌관으로서 전시 국가방위위원회(GKO)의 적군 보급을 담당했고, 1964년부터 25년간 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으로 코시긴·티호노프·리시코프를 보좌했다. 폴리트뷰로 위원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가장 비밀스러운 당 지도부 결정문을 받아보았고, 중앙위 부서장들도 주요 안건을 그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그의 경험과 기억은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가 작동하게 만든 제도적 축이었다.
경력 연표
- 1924–27농촌소비에트 서기 · 협동조합 서기 · 클럽장
- 1927–31모스크바국립대 소비에트법학부
- 1930–41인민위원회의 기구: 선임보좌관·컨설턴트·부문장
- 1941–46인민위원회의 사무국 부국장 · 미코얀의 GKO 보급 보좌관
- 1946–53각료회의 사무국 부국장
- 1953–64각료회의 부업무관리국장
- 1964–89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89–90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고문
관련 역사 사건
전시 보급: "군대의 숫자는 우리만 알았다"
전쟁 발발 당시 스미르튜코프는 모스크바 근교 소브나르콤 휴양소에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아침, 전화 한 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차가 보내져 크렘린으로 복귀했다. 미코얀은 그를 국방위원회(GKO)의 적군 보급 담당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주보급부장 안드레이 흐룔료프 장군과 함께 일하도록 했다. 스미르튜코프의 전시 업무는 크게 세 갈래였다. 첫째, 흐룔료프와 함께 전선과 후방의 보급 실태를 직접 점검하는 일이었다. 초기에는 모스크바 주변의 막대한 군수 창고들을 둘러보며 어떤 물자를 후송하고 어떤 것을 전선에 남길지 결정했다. 한번은 거대한 창고에서 "수백만 켤레"라고 보고했지만 흐룔료프가 조용히 "겨우 80만 켤레"라고 정정했고, 미코얀은 웃으며 "80만 켤레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전쟁 내내 두 사람은 전선을 오가며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이바노보의 방직 공장들이 군용 트럭 징발로 원료 조달이 막히자, 흐룔료프는 콜호스 말로 수송-마차 사단을 편성하는 창의적 해법을 내놓았다. 둘째, 블라디미르 파블로프와 교대로 봉쇄된 레닌그라드를 오가며 보급을 지원했다. 작은 군용 선박으로 포격 속에서도 식량을 밀어넣고, 비행기로는 초콜릿과 계란 분말 같은 고칼로리 식품을 실어 날랐다. 전 레닌그라드 통계국장 볼로다르스키의 도움으로 도시 곳곳의 숨은 자재를 찾아냈고,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포위된 도시에 연료를 공급했다. 이 공로로 1943년 3월 첫 레닌 훈장을 받았다. 셋째, 가장 비밀스러운 임무였다. 매달 전군의 병력 규모와 월별 전사·부상자 수를 집계해 식량 보급 신청서를 작성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전 소련에 단 다섯 명뿐이었고, 스미르튜코프도 그중 하나였다. 참모본부의 체트베리코프 중장이 그의 사무실로 와서 함께 초안을 작성하고 숫자를 손으로 기입했다. 미코얀과 흐룔료프가 서명한 후 스미르튜코프가 스탈린의 비서 포스크료비셰프에게 직접 전달했다. 스탈린은 다른 문서는 수주일씩 묵혀도 이 문서만은 즉시 서명했고, 때로는 GKO 의장으로서 마지막 장에, 그리고 당과 국가의 최고 책임자로서 첫 장에도 서명을 두 번이나 했다. 전쟁 말기인 1945년 5월 9일 새벽 5시, 스미르튜코프는 미코얀, 흐룔료프와 함께 스파스카야 탑을 나서 베를린으로 향했다. 스탈린의 지시로 베를린 시민들에게 배급할 식량을 책정하는 임무였다. 그날 저녁, 드레스덴에서 네 사람은 그라녜니 스타칸에 보드카를 따라 승리를 축하했다. 미코얀이 "왜 이렇게 많이 따랐냐"고 묻자 스미르튜코프는 "한 번에 마시고 더는 안 마시겠습니다"라고 답했고, 미코얀은 "마부의 심리로군!"이라고 웃었다. 그렇게 그에게 전쟁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