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반세기 동안 당의 회계를 감시한 구볼셰비키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경력 연표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 1917–191910월 봉기 모스크바당 5인 지도부 · 군사혁명위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 간부, 1919.3 중앙집행위원장 대행
- 1922–1926우크라이나 부수상 · 국가계획위원장 · 당 중앙통제위원장 겸 노동자농민감찰 인민위원
- 1926–1927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27–1951전연방공산당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24년간, 사망 시까지)
- 1930–1934러시아 공화국 보건인민위원 (겸임)
관련 역사 사건
류틴 일가의 비극: 스탈린 충신의 가족이 겪은 숙청
블라디미르스키의 장녀 예브도키야(1895~1947)는 볼셰비키 당원 마르테먄 류틴과 결혼했다. 류틴은 1932년 스탈린을 '혁명의 무덤 파는 자'로 규정하고 그의 독재를 비판하는 200쪽 분량의 강령 「스탈린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위기」를 작성한 인물로, 이른바 '류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7년 1월 총살되었다. 블라디미르스키는 1927년부터 사망까지 중앙감사위원회 의장으로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감시하는 자리에 있었고, 스탈린 노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자신의 사위가 당에서 가장 위험한 반대파로 처형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예브도키야 또한 1937년 10월 '반혁명 문헌 소지 및 적의 찬양' 혐의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카자흐스탄 카를라크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1947년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두 아들인 블라디미르스키의 외손자들 또한 살아남지 못했다. 장손 바실리 류틴(1910년생)은 TsAGI 설계국 엔지니어로 일하다 1938년 9월 체포되어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총살, 코무나르카에 매장되었고, 차손 비사리온(1913년생)은 우흐트페흘라크 수용자로 있다가 1937년 12월 트로이카 판결로 처형되었다. 막내 손녀 류보피만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1950년대 중반 석방되었고, 이후 1956년과 1958년 두 차례 아버지 류틴의 복권을 청원했으나 거부당했다(류틴은 결국 1988년에야 복권된다).
소련의 최고위직에 오르지 못했으면서도 24년간 당의 회계 감사라는 핵심 직책에서 살아남은 블라디미르스키는, 크렘린 성벽에 안장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사위와 두 외손자는 국가가 집행한 총살형으로, 딸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충성과 생존이 곧 가족에 대한 보호를 의미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잔혹한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