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 강변 고아원 소년에서 코시긴 내각 부의장이 된 당 조직인사 전문가
1952년 11월 19일, 건설이 지연되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간부회의에서 사회를 본 예프레모프는 현 상황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 규정하고, "성공의 열쇠는 동지적 지원, 즉 팔꿈치 감각에 있다"고 선언했다.
사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예프레모프는 기술학교와 산업대학을 거쳐 전기기술자로 출발했다. 1942년 쿠이비셰프 당 기구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제1서기로 도약했고,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지역경제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1959년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으로 발탁되어 연방 차원의 간부 인사를 관장했고, 첼랴빈스크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의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코시긴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돼 6년간 경제행정을 총괄했다. 말년에는 동독과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외교무대로 전환했고,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2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31–33사마라 에너지콤비나트 기술전기검사소장
- 1933–34붉은 군대 복무 (볼가 군관구 사령부)
- 1934–38쿠이비셰프 목재가공콤비나트 부기계장·주임동력기사
- 1941–42차파옙스크 제15공장 건설 주임동력기사
- 1942–51쿠이비셰프 주당: 강사·부서장·서기 대리·중공업부장
- 1951–52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 1952–5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 진두지휘)
- 1959–61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 ·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
- 1961–62첼랴빈스크 주당 제1서기
- 1962–65고리키 공업주당 제1서기 → 고리키 주당 제1서기 (소브나르호스 분할·통합기)
- 1965–7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코시긴 내각)
- 1971–75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5–86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건설과 지역 통치
예프레모프가 쿠이비셰프주 당 조직을 이끈 1952~1959년에는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건설의 추진이 지역 당 기구의 핵심 과제가 됐다. 준비 지연으로 1950~1952년 국가 계획이 차질을 빚을 위기에 놓이자, 그는 1952년 11월 19일 수력건설 책임자 회의를 주재하고 건설 현장의 상황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건설 구역과 작업장에 당 조직이 매일 점검을 실시하도록 요구했다. 공사는 1954년부터 본격화됐고, 발전소는 1957년 10월 14일 전 출력으로 가동됐다. 그는 가동 사실을 중앙위원회에 보고했다.
건설 마무리 과정에서 예프레모프는 노동자와 기술자에 대한 포상과 수상 후보 추천을 중앙에 요청했다. 특히 공사에 투입된 3만 5천 명이 넘는 수감자 가운데 공로가 큰 이들의 사면도 요청했다. 1957년 11월에는 건설 참가자 16명을 레닌상 후보로 추천했다. 수력발전소의 모든 시설은 1958년 8월 사용 승인을 받았다. 그해 8월 9일 건설 공로로 예프레모프도 레닌훈장을 받았다. 발전 확대와 함께 지역의 주택난도 남아 있었다. 쿠이비셰프시에서는 1957년 4월 3만 명, 당시 인구의 11퍼센트가 긴급한 주택 필요자로 집계됐다. 그는 1958년부터 경제적인 표준 설계와 조립식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활용해 주택을 단지별로 짓는 방식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