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트로판 이바노비치 네델린

Митрофан Иванович Недел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60 ✕ 폭발사

전략로켓군을 창설하고 R-7 개발을 주도한 포병총사령관, 발사대에서 산화하다

폭발이 가라앉은 뒤 부분적으로 녹아내린 금성훈장, 어깨 견장 한 짝, 폭발 순간에 멈춘 손목시계만이 남았다.

1902년 11월 9일(구력 10월 27일) 러시아 제국 탐보프현 보리스оглеб스크에서 태어나 1960년 10월 24일 바이코누르에서 사망했다. 출신 배경은 사료마다 달라 귀족 집안, 노동자 집안, 상인 점원 집안으로 갈리며, 아버지는 1907년에 사망했다. 1920년 붉은군대에 입대해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고 1924년 당에 입당했으며, 스페인과 핀란드와 독소전쟁에서 포병 부대를 지휘했다. 1950~1952년과 1953~1955년 두 차례 포병총사령관을 지냈고 그 사이인 1952~1953년에는 무장 담당 전쟁차관을 맡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미사일 프로그램의 지휘자: R-16과 1960년 10월

1950년대 중반 소련 지도부가 대륙간 핵무기 투발 수단을 놓고 벌인 선택에서 네델린은 폭격기가 아니라 로켓이 미국 본토를 겨냥할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고 판단했고, 세르게이 코롤료프에게 중량급 R-7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지시했다. R-7은 실전용 대륙간탄도미사일로는 끝내 효과를 내지 못했지만, 그 추진체는 스푸트니크와 보스토크 유인 우주선을 궤도에 올릴 만큼 강력했고, 이 결정이 초기 우주 경쟁에서 소련이 앞서는 출발점이 되었다. 네델린이 소련 미사일·우주 프로그램의 중심에 서게 된 경로가 여기에 있다.

1960년 흐루시초프는 소련 핵전력의 준비태세를 한 단계 끌어올릴 R-16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하일 얀겔이 총설계자였고 네델린은 전략로켓군을 이끌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11월 7일 볼셰비키 혁명 기념일에 맞춰 R-16의 첫 시험발사 성공을 선물로 바치려 했다. 네델린은 시험을 감독하는 R-16 국가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는데, 이 임시 기구의 명단은 흐루시초프와 각료회의 사무총장 G. 스테파노프가 직접 서명한 것이었다. 위원회는 1960년 10월 3일 첫 회의를 열고 발사일을 10월 23일로 정했다. 네델린은 국방차관, 포병 원수,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R-16은 액체산소를 산화제로 쓰는 R-7보다 실용적인 전략미사일을 목표로 했다. 액체산소는 장기 발사 준비태세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R-16은 저장성이 좋은 하이퍼골릭 추진제 조합인 UDMH와 사산화이질소를 채택했는데, 이 조합은 '악마의 독'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부식성과 독성이 극심했다. 게다가 연료 주입이 끝난 뒤에는 추진제를 빼낼 절차 자체가 없었고, 부식성이 강한 추진제를 빼내면 발사체를 다음 시험에 다시 쓸 수도 없었다. 발사대에 세워진 로켓은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선 상태였다.

이 조건에서 발사대에서 벌어진 네델린의 행동은 사료가 갈리는 사안이다. 연료 주입 중에 그와 얀겔이 안전 규칙을 무시하고 발사대에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사거리 책임자 K. 게르치크 소장과 제2시험국장 그리과리안츠는 '상관인 네델린이 있는 자리'에서는 안전 규칙을 강제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10월 23일 게르치크의 팀이 연료를 빼내고 로켓을 발사대에서 옮기자고 제안했으나 거부되었고, 추진제 배출 제안을 전해 들은 네델린이 핵전쟁에서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다고 소리쳤다는 일부 기록도 있다. 모스크바의 압박도 있었다. 10월 24일 크렘린에서 최소 두 차례, 어쩌면 흐루시초프 본인으로부터 R-16이 언제 날아오를 것인지 묻는 전화가 왔고, 네델린은 발사대에 차로 가서 상황을 직접 보겠다고 했다. 측근들은 이를 프로그램에 대한 헌신으로 변호했고, 다른 참전자들은 그의 태도가 인원의 주의를 흩트려 발사대의 안전을 더욱 위태롭게 했다고 말한다.

사후 평가는 이 비극을 한 사람의 무모함으로 돌리지 않는다. 연료가 주입된 발사체 옆에서 문제 해결과 발사 준비가 겹쳐 진행되는 동안 보호 위치에 있어야 할 인원이 차량 가까이 모여 있었던 통제와 절차, 관리 체계 전반의 실패로 본다. 흐루시초프의 일정과 11월 7일 기념일 맞춤 요구가 정상적인 안전 여유를 침식한 조건으로 지목된다. 사고 조사위원회 자체의 결론도 여기에 닿아 있다. 위원회는 관리진이 복잡한 발사체에 지나치게 자신해 충분한 분석 없이 결정을 내렸다고 보았고, 직접 원인으로는 EPK V-08 밸브가 예정 없이 작동하도록 허용한 제어계통의 결함을 들었다. 브레즈네프가 이끈 위원회는 처벌 의사가 없으며 '죄 있는 자들은 이미 처벌받았다'고 말했다. 같은 해 11월 시험 재개가 계획되었고, R-16의 첫 성공 비행은 1961년 2월 2일 이루어졌다.

네델린 참사: 은폐된 발사대의 비극

1960년 10월 24일 바이코누르 41번 발사대. 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준비하던 중, 2단 엔진 점화를 제어하는 전기밸브가 예정 없이 작동하며 2단 엔진이 점화되었다. 불길은 1단 연료 탱크를 뚫고 들어가 충분히 연료가 주입된 로켓 전체를 직경 120미터의 화염구로 만들었다. 발사대 주변에 있던 약 250명 중 74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부상자 중 16명이 추가로 사망해 희생자는 최소 92명에 이르렀다. 로켓에서 불과 15~20미터 거리의 의자에 앉아있던 네델린 역시 그 자리에서 산화했다.

소련 당국은 네델린의 사인을 '항공기 추락사고'라고 발표했으며, 다른 희생자들의 존재는 완전히 은폐했다. 브레즈네프가 이끈 조사위원회는 '처벌받아야 할 자들은 이미 처벌받았다'며 책임 추궁을 중단시켰고, 사고 문서는 30년 가까이 중앙위원회 기밀문고에 봉인되었다. 진실은 1989년 《오고뇨크》 잡지의 〈41번 발사대〉 기사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참사는 소련 우주·미사일 프로그램 역사상 최악의 지상 재난이자, 체제적 비밀주의와 무모한 일정 강행이 초래한 비극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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