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오른 유일한 리투아니아인, 1월 사태로 수감된 마지막 모스크바파 서기장
2000년 아담쿠스 대통령이 사면을 제안하자 그는 거절했다: 「나는 조국 앞에 아무 죄도 없다.」
리투아니아 알리투스 출신으로 1942년부터 노동자로 일하며 공산당 기구에서 성장했고, 1989년 리투아니아공산당 분열 이후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에 맞서 연방 유지를 주장했으며, 1991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군대 투입을 요청하고 「국가구원위원회」를 이끌어 소련군의 빌뉴스 텔레비전 탑 진압 작전에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작전에서 민간인 14명이 사망했고, 1994년 민스크에서 체포되어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살인 방조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담쿠스 대통령의 사면 제안을 거부하며 '조국 앞에 죄가 없다'고 답했고, 2006년 1월 13일 만기 출소했다.
경력 연표
- 1942–1944우드무르티야에서 목수·선반공
- 1944–1955콤소몰·공산당 기구 활동, 빌뉴스 사범대학 졸업
- 1963–1976당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빌뉴스 공과대학 교수
- 1976–1990빌뉴스 사범대학 과학공산주의 교수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1991–1994벨라루스로 도피
- 1994–2006체포 후 12년형, 2006년 1월 만기 출소
관련 역사 사건
과학공산주의 학자에서 분열의 지도자로
부로케비추스는 리투아니아에서 과학공산주의를 가르친 대표적인 학자였다. 1955년 빌뉴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사회과학아카데미를 마친 후, 당 역사 연구소 선임연구원과 빌뉴스 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1976년부터 빌뉴스 사범대학 과학공산주의 교수로 재직했다. 1975년에는 「리투아니아공산당의 인텔리겐치아 대상 이데올로기 사업, 1940~1965」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는 『형제 민족 가족 속의 리투아니아』(1967), 『리투아니아공산당의 인텔리겐치아 대상 이데올로기 사업 1940~1965』(1972), 공저 『이데올로기 사업의 이론과 실천』(1985)이 있다. 그의 학문적 궤적은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지식인층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89년 12월 리투아니아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가 이끄는 당이 소련공산당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자, 부로케비추스는 분리에 반대하며 모스크바 강령을 고수하는 소수파의 지도자로 나섰다. 소련 체제 내 리투아니아의 존속이라는 그의 정치적 입장은 학자로서 평생 연구해온 소비에트 연방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천적 귀결이었다. 그가 이끈 친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은 수적으로는 브라자우스카스의 독립파에 미치지 못했으나, 1990~1991년 사이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해체에 저항하는 실질적인 정치 세력으로 기능했다. 후일 부로케비추스는 자신이 배신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으며, 리투아니아 사회당 계열에서는 그를 두고 '팔지 않은 사람'이라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