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크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크림 타타르인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우즈베키스탄에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크림 반도 귀환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우즈베크 공화국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 중앙과 공화국 엘리트의 연결을 보여준다.
경력 연표
- 1940s–1950s우즈베크 공화국 콤소몰·당·국가 행정에서 성장
- 1959–1970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70–1974민족소비에트 의장, 중앙의 공화국 대표제에서 높은 지위에 오름
- 1974우즈베크 지도부 교체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퇴임
- 이후공식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짐
고아에서 최고 지도부로: 초기 생애와 성장
나스리디노바는 1920년 12월 26일 투르케스탄 자치공화국 코칸트에서 태어났다. 짐꾼이었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석 달 전에 사망했고, 열세 살이던 어머니는 아기에게 '야드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고아가 된 남녀 아이에게 흔히 주는 이름이었다. 여섯 살 때 의붓아버지에게 길가에 버려진 후,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거두어져 여러 가정을 전전하다 열한 살에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고아원에 들어갔다. 직업학교와 타슈켄트 철도운수대학 노동자학부를 거쳐 1941년 타슈켄트 철도운수기술자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타슈켄트 철도에서 기술자로 일했고, 1942년 당에 입당한 직후 우즈베크 콤소몰 중앙위 학교 담당 서기가 되었다. 이후 타슈켄트 주 콤소몰 제1서기(1946), 우즈베크 콤소몰 중앙위 제2서기(1948)를 거쳐 1952년 우즈베크 SSR 건설자재공업부 장관, 1955년 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했다. 고아원 출신의 중앙아시아 여성이 35세에 공화국 부총리급에 오른 이례적 경로는, 스탈린 시대 소련 체제가 민족·젠더 측면에서 창출한 사회이동의 극적인 사례였다.
크림 타타르인 귀환 반대
1944년 스탈린은 크림 타타르인 전체를 나치 협력 혐의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고, 수십만 명이 우즈베크 SSR에 정착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이후 타타르인 운동가들은 고향 귀환을 요구하며 모스크바와 타슈켄트에서 청원·시위를 이어갔다. 1967년 9월 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는 타타르인에 대한 집단적 반역 혐의를 철회하는 포고령을 발표했으나, 이는 '이전에 크림에 거주했던 타타르 국적 시민'이라는 표현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귀환 권리는 부정했다. 우즈베크 SSR 최고간부회 의장이자 소련 최고간부회 부의장이었던 나스리디노바는 귀환 반대 진영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는 크림 타타르인 인권운동가들과의 면담에서 '우즈베키스탄에는 노동력이 필요하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경제적 실용 논리로 귀환을 막은 이 입장은 중앙아시아 공화국 엘리트가 연방 차원의 민족문제에서 행사한 구조적 거부권의 한 사례였다. 타타르인의 대규모 귀환은 결국 페레스트로이카가 열린 1989년에야 시작되었다.
면화 사건과 몰락
1970년대 중반, 소련 당 중앙통제기관은 나스리디노바의 부패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시절(1959~1970),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에 대한 사면을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소련 인권운동가 콘스탄틴 시미스에 따르면, 사면 1건당 10만 루블이 요구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브레즈네프 시대 우즈베크 공화국 지도부 전반을 휩쓴 '면화 사건'(хлопковое дело)의 일환으로 확대되었다. 나스리디노바는 1974년 민족소비에트 의장직에서 물러나 소련 건설자재공업부 차관으로 좌천되었고, 1979년 연방급 개인연금자로 은퇴했다. 1988년 11월 18일, 그녀는 뇌물수수 혐의로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나 1991년 4월 3일, 소련 검찰청이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고 '범죄 구성요건 부재'를 이유로 사건을 종결하면서 당적이 회복되었다. 이는 소련 후기 민족공화국 엘리트에 대한 중앙의 숙청이 지닌 정치적 성격과 증거의 취약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모스크바에서의 말년: 스캔들, 무죄, 그리고 망각
1974년 민족소비에트 의장직에서 물러난 나스리디노바는 소련 건설자재공업부 차관으로 좌천되었고, 1979년 연방급 개인연금자로 공식 은퇴했다. 남편 시로지 누루트디노프는 1966년 이미 사망했고, 두 자녀 모두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87년, 이즈베스티야는 나스리디노바가 우즈베크 SSR 최고간부회 의장 시절 뇌물 10만 루블을 수수하고 국고 금을 스위스 은행으로 빼돌렸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수사언론인 아르카디 사흐닌은 그녀가 아들의 호화 결혼식을 국비로 치렀다고 주장했다. 1988년 그녀는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어 당에서 제명되고 연금도 박탈당했다. 그러나 나스리디노바는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이즈베스티야에 반박문 게재를 요구했고, 1990년 12월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형사 사건을 종결했다. 1991년 4월 당적이 회복되고 2년 6개월분의 연금이 소급 지급되었다. 그녀는 2006년 4월 7일 모스크바에서 85세로 사망했으며, 쿤체보 묘지에 안장되었다. 소련 최고 지도부까지 오른 중앙아시아 여성의 마지막은 조용했고, 그녀의 이름은 소련 해체와 함께 공적 기억에서 빠르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