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고르부노프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Горбун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92–1938 ✕ 처형

레닌의 개인비서에서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까지 소비에트 과학행정의 설계자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사망 기록의 위조와 복권 이후의 진상 규명

고르부노프의 죽음은 오랫동안 사실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1947년 1월 가족에게 교부된 사망 증명서에는 사망일이 1944년 10월 30일, 사인은 심장 기능 쇠퇴로 적혔고 사망 장소는 비어 있었다. 이 날짜는 1974년 간행된 과학아카데미 인명록에 그대로 실렸고, 1984년 화학자 인명록에서는 사망지가 아르한겔스크 주 칠리마로 '정정'되기까지 했다. 1972년 판 대소비에트백과사전은 생몰일을 모두 왜곡해 6월 21일 및 1937년 9월 7일로 적었으며, 이 1937년 사망설은 1985년 대백과사전에도 남았다.

그가 등반가 사건의 일부로 1938년 2월 19일 체포되었고, 과학아카데미에서 1938년 4월 29일 제명되었으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서명으로 처형 명단에 올라 1938년 9월 7일 모스크바 콤무나르카에서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1954년 3월 13일 복권된 뒤에도 곧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정확한 처형일이 확인된 것은 1988년 8월 12일, 아들 안드레이 고르부노프의 문의에 대법원이 답한 때였다. 그가 묻힌 곳 역시 여러 해 뒤 '메모리알'의 작업으로 콤무나르카 특수 시설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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