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리치코프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Рычков
소련 러시아 1897–1959 ○ 자연사

대숙청부터 전범 재판까지 10년간 소련 사법을 관장한, 법학 학위 없는 법무인민위원

1940년 7월, 리치코프는 검찰총장 판크라티예프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점심시간 후 20분 이상 지각하거나 종료 20분 전에 무단 퇴근한 노동자는 '무단결근'으로 형사 입건하고 최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우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정규 고등교육 없이 법무인민위원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대법원 군사합의부 위원으로 모스크바 쇼 재판에 참여했고 동부 지역의 '반혁명' 재판을 주재했다. 1938년 1월 법무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 말기, 전시 사법 행정, 전후 독일 전범 공개 재판까지 10년간 소련 사법을 총괄했다. 1940년 20분 이상 지각을 형사 처벌하는 노동 규율 명령을 공동 서명했다. 1948년 당 인사 부서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으나 군 검찰 부직을 거쳐 1955년 은퇴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전범 공개 재판과 상설위원회

1945년 11월 21일, 폴리트뷀로는 「독일군 및 독일 징벌기관 전직 군인들에 대한 재판 실시에 관하여」 결의를 채택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전날 개정된 직후였다. 이 결의는 소련 8개 도시에서 전범들에 대한 공개 재판을 열도록 했으며, 준비 위원회 구성을 명시했다: 위원장 안드레이 비신스키, 부위원장 니콜라이 리치코프, 그리고 골랴코프, 크루글로프, 아바쿠모프, 아파나시예프였다. 리치코프가 법무인민위원으로서 실무를 총괄했다.

1945년 12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스몰렌스크, 브랸스크, 레닌그라드, 니콜라예프, 민스크, 키예프, 벨리키예루키, 리가 등 8개 도시에서 군사재판소의 공개 재판이 열렸다. 피고 84명 중 독일군 장성 18명을 포함한 독일군 및 SS 장교·병사들이 기소되었으며, 66명에게 교수형이, 19명에게 최장 20년의 강제노동형이 선고되었다. 판결문은 우크라이나·벨로루시·발트·러시아 점령지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포로 학대를 조목조목 적시했다. 재판은 피고인들에게 소련 국선 변호인이 배정되고 외신 기자들도 참관하는 등 절차적 공정성을 갖추었으며,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는 같은 지면에 뉘른베르크 소식과 이들 '소련판 뉘른베르크' 재판 소식을 나란히 실었다. 형이 확정된 사형수들은 해당 도시의 중앙 광장에서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7년 가을부터 리치코프는 독일 전범 공개 재판 상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두 번째 재판 물결을 지휘했다. 스탈리노(현 도네츠크), 보브루이스크, 폴타바, 비텝스크, 고멜, 체르니고프, 키시뇨프, 노브고로드, 세바스토폴에서 9건의 공개 재판이 열렸으며, 이번에는 독일군뿐 아니라 헝가리·루마니아 전범들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형 대신 25년 강제노동형이 최고형으로 적용되었다. 이 재판들은 소련 점령지에서의 나치 범죄를 국제적으로 입증하는 동시에, 전후 소련의 법치 이미지를 대내외에 투사하는 정치적 과제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이 공개 재판들은 1930년대 후반 리치코프 자신이 대법원 군사합의부 위원으로 참여했던 모스크바 쇼 재판이나 동부 지역의 비공개 '반혁명' 재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었다. 후자가 사전에 확정된 판결을 신속히 집행하는 테러 장치였다면, 1945~1947년의 전범 공개 재판은 증거 제시, 변호인 선임, 언론 공개, 판결문 공표 등 근대적 형사절차의 외형을 갖추고 실제 전쟁범죄를 심판했다는 점에서 리치코프 경력의 가장 복합적인 장면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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