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نور محمد تره‌کی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17–1979 ✕ 베개에 질식사

소련의 군사 개입을 거듭 요청했으나 제자의 손에 죽으면서 결국 소련군을 불러들인 아프간 혁명정권 초대 수반

타라키: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지원을, 병력과 무장을, 요청합니다.' 코시긴: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타라키: '당신들이 협의하는 사이 헤라트는 함락될 것입니다.' (1979년 3월 18일, 헤라트 봉기 와중의 전화 통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서기장이자 1978년 4월 혁명으로 수립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초대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 소작농 출신으로 봄베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귀국 후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을 쓴 작가 출신 정치인이었다. 집권 후 급진적 토지개혁과 세속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농촌의 전통적 반발로 무장 봉기가 확산되었고, 소련에 반복적으로 군사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79년 9월 후계자 하피줄라 아민에게 축출된 뒤 베개에 질식사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두 달 뒤 소련의 침공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작가·언론인에서 당 건설자로, 1932~1977

타라키의 정치 이력은 1978년 4월 이전까지 주로 문필 활동과 당 조직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1917년 가지니 주 나와 구역의 가르지 파슈툰 타라카이 소작농 가정에서 삼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나와의 마을 학교를 다니다가 1932년 열다섯 살에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인도 봄베이로 갔다. 항구 도시에서 칸다하르 상인 가문이 운영하는 파슈툰 무역회사의 점원으로 일했고, 야간 강좌에서 인도 공산당원들과 만나 사회 정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 무렵 인도 국경 지역의 파슈툰 민족주의자이자 '적의(赤衣) 운동' 지도자인 칸 압둘 가파르 칸을 만난 것도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었다.

1937년에는 경제부 장관 압둘 마지드 자불리 밑에서 일하며 러시아인들과 알게 되었고, 이후 바크타르 통신사 부국장을 지내며 작가·시인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대표작 『드 방 모사페리』(『방의 방랑』)는 아프가니스탄 노동자와 농민이 겪는 사회경제적 곤란을 다룬 작품으로, 소련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현한 문학으로 평가받았으며 그는 소련 정부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막심 고리키'라는 칭호를 얻었다. 소련 방문 때는 소련 공산당 국제부장 보리스 포노마레프의 영접을 받았다.

정치 활동은 탄압과 생계 이동을 거쳤다. 사르다르 모하마드 다우드 칸의 총리 재임 시기 급진 인사에 대한 탄압이 흔했으나, 언어 능력을 인정받아 1952년 주미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자히르 국왕 정부를 독재적·전제적이라고 공개 비난했고, 이는 미국에서 큰 반향을 얻는 동시에 본국의 주목을 끌어 결국 파면되어 귀국 조치되었다. 다만 체포되지는 않았다. 실업 상태를 거쳐 카불의 미국 해외사업단에서 통역으로 일했고, 1958년에는 번역회사 누르 번역국을 세웠으며, 4년 뒤에는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다 1963년 그만두고 인민민주당(PDPA) 창당에 집중했다.

1965년 1월 1일, 카불 카르테 차르 구역의 자택에서 열린 PDPA 창당 대회에서 그는 바브락 카르말을 누르고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카르말은 제2서기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의회 선거에 후보로 나섰으나 의석을 얻지 못했고, 선거 직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주요 좌익 신문 『칼크』를 창간했으며 이 신문은 첫 발행 한 달 안에 금지되었다. 1967년, 창당 2년도 되지 않아 PDPA는 분열했다. 가장 큰 두 파벌은 그가 이끄는 칼크(민중)와 카르말이 이끄는 파르참(기치)이었고, 양자의 주요 차이는 계급투쟁에 기초한 레닌주의적 국가 건설을 지지한 타라키와 '광범한 민주 전선'을 원한 카르말 사이의 노선 대립이었다. 1978년 4월 이전까지 그는 의회 진출에도, 당의 통일 유지에도 실패한 채 당내 분파 경쟁과 정부의 언론 탄압을 반복해 겪은 조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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