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중대한 외설」죄로 2년 강제노동형을 받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
1895년 퀸즈베리 후작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가 역으로 1885년 형법 개정법 제11조로 기소되어 2년 강제노동형을 받았다.
더블린의 앵글로아일랜드계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나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고전학을 공부한 작가·극작가. 유미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0)과 「진지함의 중요성」(1895) 같은 사교 희극으로 런던 최고의 극작가가 되었다. 연인 앨프리드 더글러스의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가 패소한 뒤 1895년 「중대한 외설」죄로 2년 강제노동형을 받았다. 출소 뒤 영국을 떠나 「세바스천 멀모스」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가난하게 살다 1900년 파리에서 수막염으로 숨졌다. 2017년 사후 사면되었다.
다른 이름: 세바스천 멀모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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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1900
독립 활동대표
문학·예술
관련 역사 사건
1895년의 재판과 망명
1891년 중반 그는 옥스퍼드 학생이던 앨프리드 더글러스(「보시」)를 만나 격렬한 관계를 맺었고, 더글러스를 통해 노동계급 남성 매춘의 지하 세계에 들어갔다. 더글러스의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은 1895년 2월 18일 와일드의 클럽에 「남색자 행세를 하는 오스카 와일드에게」라는 명함을 남겼고,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부추김 속에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후작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후작 쪽 변호사 에드워드 카슨이 와일드와 관계한 남성 매춘부들을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하자 와일드는 고소를 취하했고, 후작은 무죄가 되었으며 소송비용으로 와일드는 파산했다.
1895년 4월 6일 그는 1885년 형법 개정법 제11조의 「중대한 외설」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감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다윗과 요나단, 플라톤, 미켈란젤로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나오는 나이 든 남자와 젊은 남자의 깊은 정신적 애정이라고 답해 박수를 받았지만, 법적으로는 오히려 혐의를 굳혔다. 첫 재판은 배심이 결론을 내지 못했고, 5월 25일 두 번째 재판에서 최고형인 2년 강제노동형을 받았다. 판사는 이 형조차 「전혀 모자라다」고 했다. 그가 만난 소년 가운데는 열여섯 살도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펜턴빌, 원즈워스를 거쳐 레딩 감옥에서 「C.3.3」으로 불리며 형기를 마쳤고, 감옥에서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긴 편지 『심연에서』를 썼다. 1897년 5월 19일 출소한 날 저녁 프랑스로 떠나 다시는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세바스천 멀모스」라는 이름으로 살며 영국 감옥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편지와 『레딩 감옥의 노래』를 썼고, 가난 속에 1900년 11월 30일 파리에서 수막염으로 숨졌다. 2017년 이른바 「앨런 튜링 법」으로 동성애 행위로 처벌받은 약 5만 명과 함께 사후 사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