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궁전 방어를 지휘한 임시정부의 마지막 기술관료
궁전이 함락되던 순간, 팔친스키는 돌격해 들어온 적위대 앞으로 뛰어들어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의회와 소비에트 대표단이 오는 중이다"라고 외쳤다.
카잔 출신 광산 기술자로, 청년 시절 아나키스트 사상에 공명했으며 1905년 혁명에 가담했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1917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 차관과 페트로그라드 총독을 거쳐, 10월 25일 키시킨의 보좌관으로서 겨울궁전 방어를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궁전 함락 직전 돌입해 온 볼셰비키 병력에게 각료들의 항복 결정을 전했다. 석방 뒤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하며 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 및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을 맡았으나, 1928년 샤흐티 재판의 후속 탄압 속에 체포되어 이듬해 '반혁명 사보타주' 혐의로 총살당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00광산 기술자, 도네츠 탄전 조사
- 1902–1905골로빈스키 탄광 지배인, 이르쿠츠크
- 1906–1913망명 (런던·토리노·로마), 토리노 세계박람회 광업부문 책임
- 1915–1917중앙군수공업위원회 간부
- 1917.03–10임시정부 통상·산업 차관, 페트로그라드 총독 (8–9월)
- 1917.10.25겨울궁전 방어 책임자, 체포
- 1918–1928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
- 1928–1929체포, 사형 선고, 총살
관련 역사 사건
소비에트 경제계획과 광업 경제학
1918년부터 러시아기술협회 회장을 맡았고, 석유가 아닌 셰일 매장량을 조사하는 활동과 연구기관 «표면과 지하»의 설립·학술지 발간을 추진했다. 1920년 페트로그라드 광업대학 교수가 된 뒤 지질·경제학적 관점에서 천연가스와 수지류를 다루는 종합 강의를 했다. 1920년대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중앙경제국의 전문가평의회와 과학기술평의회에서 활동하고 국가계획위원회 상임 자문을 맡았으며, 러시아 전기화 계획(GOELRO) 작성과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계획의 자문에도 참여했다. 광업 경제학의 주요 전문가로서 광물성 건축자재에 관한 다섯 권의 연구서 편집을 맡기도 했다. 이 경력은 혁명 전 임시정부에서 산업·군수 행정가로 활동한 그가 소비에트 체제에서도 기술·경제 전문성을 발휘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자료는 그가 관련 계획의 최종 결정권자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1928년 4월 다시 체포된 팔친스키는 공학자 조직의 협의회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구금되었다. 1929년 5월 22일 OGPU 콜레기야는 철도 운송과 금·백금 산업에서의 음모 및 사보타주를 지도했다는 혐의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백과사전은 같은 날 총살되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그의 기술관료 경력의 종결이자, 전문 기술자들이 국가 탄압의 대상이 된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