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건설의 첫 인민위원, 전시 공업을 기초부터 세우다
1939년, 스탈린이 그를 초대 건설인민위원으로 지명하자 긴즈부르크는 당으로부터 받은 '엄중경고'를 솔직히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변: «결핵 환자도 잘 살고 일하는데, 경고 하나쯤 안고 사시오.»
소련 건설을 최초로 단일 국가기구로 통합한 인물. 민스크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MVTU 졸업 후 레닌 묘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을 지냈다. 1939년 초대 Наркомстрой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전국 건설역량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묶었고, 전쟁 중에는 방위공장의 시베리아 긴급이전·체바르쿨 제강공장 75일 완공·라도가 호수 30km 수중 송유관 부설 등 전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1970년까지 군사건설·건자재공업 장관과 스트로이방크 총재를 거치며 소련 건설행정의 중추로 남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7–1932 산업·생산 운영 · 소련 · 중공업 · 군수공업
경력 연표
- 1917–1919지즈드라 소비에트 서기, 제8군 정치부
- 1919–1921군사경제아카데미 정치위원
- 1927–1932MVTU 강사, 노농검사인민위원부 건설그룹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 (오르조니키제 휘하)
- 1937–1938중공업 부인민위원
- 1938–1939건설위원회 의장 (인민위원회의 산하)
- 1939–1946초대 건설인민위원 (Наркомстрой)
- 1946–1947군사·해군 건설 인민위원 → 장관
- 1947–1950건설자재공업 장관
- 1963–1970스트로이방크 총재
관련 역사 사건
철근콘크리트 구조 기술자에서 건설 행정가로
긴즈부르크는 행정 관료로만 출발한 것이 아니라 구조 기술자로 출발했다. 1915~1917년 펜자 실과학교 학생이던 그는 1917~1918년 칼루가주 지즈드라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서기, 1918년 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정보국장, 1918~1919년 제8군 정치부 회계·배치과장 겸 당 서기, 1919~1921년 군사경제아카데미 군사위원을 거쳤다. 1926년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МВТУ)를 구조 설계자 자격으로 졸업하고 1927~1932년 같은 학교 철근콘크리트 구조 교실 부교수로 강의했다.
1923년 학생 신분으로 전러시아 농업·수공업 전시회 시설 공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흐딘카 중앙비행장, 오차코프와 니콜라예프의 철근콘크리트 격납고 건설에 관여했다. 1924년에는 A. V. 슈세프의 초청으로 레닌 묘 구조물 설계를 맡았고, 1926~1930년에는 중앙전신국 건설 현장의 기사 보조로 일했다. 1929~1932년 노동농민검열인민위원부 건설 담당 집단을 이끌었고, 1930년 독일 출장에서 얇은 벽 철근콘크리트 셸 구조의 공사 적용을 연구한 뒤 얇은 벽 철근콘크리트 돔과 볼트에 관한 독일어 저작을 번역했다.
이러한 기술 경력은 1932~1937년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Главстройпром) 국장, 1937~1938년 중공업인민위원 대리, 1938~1939년 인민위원회 건설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그가 전연방 건설 행정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토대가 되었다. 소련 최고경제회의 간부회의 위원, 중공업인민위원부 부원, 최초 기술조건 작성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산업시설 설계자 편람 제4권과 잡지 «건설산업»의 편집자로도 활동했다. 1934년 1월 26일~2월 10일 열린 전연합공산당(볼셰비키) 제17차 대회에 발언권 대의원으로 참석했으며, 1930~1934년에는 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이었다. 건설 분야의 학술·기술 기반을 다진 공적으로 1927년 부교수, 1957년 소련 건축·건설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66년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명예건설가 칭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