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피마 일리이니치나 고프네르

Серафима Ильинична Гопнер
소련 러시아 1880–1966 ○ 자연사

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코민테른 시절 (1928–1943)

고프네르는 코민테른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919년 제1차 대회부터 1935년 제7차 대회까지, 창립부터 해산 직전까지 열린 모든 코민테른 세계대회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대표로 참석한 유일한 인물이다. 1928년부터 1943년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1928년부터 1938년까지 모스크바 코민테른 기구에서 실무 책임자로 근무했다.

코민테른에서의 10년간 그녀는 각국 공산당과의 연락, 선전 자료 작성, 여성 운동 국제 연대 실무를 담당했다. 1930년대 초 코민테른이 '계급 대 계급' 노선에서 반파시스트 인민전선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우크라이나 대표단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7년 대숙청의 파고가 코민테른 기구를 덮치면서 고프네르도 위기를 맞았다. 그해 그녀의 전 남편이자 우크라이나 공산당 전 서기였던 에마누일 크비링이 체포·처형되면서, 고프네르는 코민테른 기구에서 해임되고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에서도 제명되었다. 크비링과 이혼 후 그와 재혼한 그녀의 조카 라이사 사피로는 '조국 반역자 가족'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다. 고프네르 자신은 1917년 이래 흔들림 없이 당 노선을 따르고 과거 분파 활동 이력이 없었으며, 성격적으로도 '해롭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1938년 코민테른에서 완전히 물러난 고프네르는 역사 연구로 전환했다. 그녀가 코민테른에서 쌓은 국제적 경험은 이후 역사학자로서의 작업에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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