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8 외교·국제활동 · 코민테른 · 코민테른
경력 연표
- 1901오데사에서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시작
- 1903RSDRP 가입, 볼셰비키 파벌에 합류
- 1905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 이후 서기
- 1910–16프랑스 망명: 파리 볼셰비키 그룹, 프랑스 사회당, 베른 여성 사회주의자 회의
- 1916–17러시아 귀환, 이르쿠츠크·예카테리노슬라프·브랸스크 지하 활동, 《즈베즈다》 편집
- 191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 1919–20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
- 1920–25예카테리노슬라프·모스크바·도네츠크·하르키우 주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5–2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출판분과장
- 1927–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전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 편집장, 《콤무니스트》 부편집장
- 1928–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7개 전 대회 대표
- 1938–45《이스토리체스키 주르날》 부편집장
- 1945–66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1960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여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서기1905년 혁명기 예카테리노슬라프(현 드니프로) 볼셰비키 위원회의 서기로 활동하며 파업·시위·전투대 조직을 지도했다. RSDRP 제4차 대회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 1917–1921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1919~20년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고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을 이끌었다.
- 1919–1921코민테른의 창설제1차 코민테른 대회 대표1919년 제1차 코민테른 대회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대표로 참석했다.
- 1937–1938대숙청대숙청으로 해임·제명된 당원1937년 대숙청의 여파로 코민테른 기구에서 해임되고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에서 제명되었다.
코민테른 시절 (1928–1943)
고프네르는 코민테른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919년 제1차 대회부터 1935년 제7차 대회까지, 창립부터 해산 직전까지 열린 모든 코민테른 세계대회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대표로 참석한 유일한 인물이다. 1928년부터 1943년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1928년부터 1938년까지 모스크바 코민테른 기구에서 실무 책임자로 근무했다.
코민테른에서의 10년간 그녀는 각국 공산당과의 연락, 선전 자료 작성, 여성 운동 국제 연대 실무를 담당했다. 1930년대 초 코민테른이 '계급 대 계급' 노선에서 반파시스트 인민전선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우크라이나 대표단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7년 대숙청의 파고가 코민테른 기구를 덮치면서 고프네르도 위기를 맞았다. 그해 그녀의 전 남편이자 우크라이나 공산당 전 서기였던 에마누일 크비링이 체포·처형되면서, 고프네르는 코민테른 기구에서 해임되고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에서도 제명되었다. 크비링과 이혼 후 그와 재혼한 그녀의 조카 라이사 사피로는 '조국 반역자 가족'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다. 고프네르 자신은 1917년 이래 흔들림 없이 당 노선을 따르고 과거 분파 활동 이력이 없었으며, 성격적으로도 '해롭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1938년 코민테른에서 완전히 물러난 고프네르는 역사 연구로 전환했다. 그녀가 코민테른에서 쌓은 국제적 경험은 이후 역사학자로서의 작업에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