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스탈린에게 건의한 GKO 과학 전권위원
회의에서 많은 부처가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집무실을 서성인 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프타노프의 회고.
소련 고등교육과 과학행정을 관장한 국가관리로, 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으로서 이오페와 함께 1942년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건의해 9월 28일 결의를 이끌어냈다. 전쟁 전에는 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소비에트 고등교육 체계를 총괄했고, 전후 초대 고등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대에는 문화부 제1차관과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을 거쳐 모교인 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1–1937 과학·기술 · 소련 ·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경력 연표
- 1919–1926돈소다 공장 노동자, 콤소몰 조직원
- 1931–1937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연구원·강사, 카르포프 연구소 당비서
- 1937–1946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VKVSh) 의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
- 1946–1951소련 고등교육부 장관
- 1953–1959소련 문화부 제1차관
- 1959–1962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
- 1962–1973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
전쟁 전 고등교육의 확장과 노동자 진학
1937년부터 1946년까지 카프타노프는 소련 인민위원회의 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1938년부터 1954년까지 고등인증위원회 의장도 겸했다. 1939년 영어로 출간된 글에서 그는 1938년 소련에 고등교육기관 716곳과 학생 60만1천 명이 있었다고 집계하고, 교육기관이 없던 혁명 전 키르기지야에 4곳, 투르크메니야와 타지키스탄에 각각 5곳, 카자흐스탄에 19곳이 세워졌다고 제시했다. 이 수치는 그의 위원회가 관리한 체계의 규모와 지역 확산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국가가 고등교육의 성장을 어떻게 공식적으로 설명했는지도 드러낸다.
그의 설명은 고등교육을 노동자와 실무자에게 연결하는 여러 경로를 강조했다. 산업·농업·교통 등 부문별 인민위원부 산하 아카데미에는 공장 관리자와 숙련 노동자, 스타하노프 운동의 노동자들이 다녔으며, 재학 중에도 원래 일터와 연결을 유지하고 실습 기간에는 생산 현장으로 돌아갔다. 공장 안에서 일과 후 수업을 듣는 공장 대학과 노동자 대상 통신교육도 운영됐다. 그는 당시 통신교육 수강자가 20만 명을 넘는다고 썼다. 이 자료는 교육 접근 확대를 그의 행정 구상에서 중심 과제로 제시하지만, 국가기관 책임자로 작성된 홍보성 설명이므로 그 성과에 관한 수치는 공식 발표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