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서 스탈린에게 반기를 든 러시아 총리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 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 1929–1930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30로미나제와 반대파 조직 — 「무언가 해야 한다」, 스탈린 비판으로 전직 해임
관련 역사 사건
- 1917.10–1918.0110월 혁명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시르초프-로미나제 반대파의 공동 지도자RSFSR 인민위원회 의장이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무언가 해야 한다'는 제목의 전당적 서한을 통해 스탈린의 권력 집중과 집단화 속도를 공개 비판했다. 좌익과 우익 반대파가 모두 패배한 후 지도부 내부에서 조직된 최초의 반대파였으며, 1930년 11월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 1937–1938대숙청표적러시아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낸 뒤 「우익」 낙인으로 1937년 처형됐다.
노멘클라투라 제도의 설계자
1921년 7월, 시르초프는 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Учраспред)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 부서는 당원 인사 기록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는데, 시르초프는 이 임무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여 개인별 파일카드 체계를 도입하고 모든 주요 직책의 임명을 중앙의 승인 아래 두는 제도를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소련 체제의 근간이 된 노멘클라투라(즉 당이 임명권을 장악한 직위 목록) 제도의 실질적 출발점이었다.
1922년 4월 스탈린이 서기장이 된 후, 시르초프의 등록배치부는 스탈린의 서기국이 직접 감독하는 핵심 기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크렘린에서 서로 붙어 있는 사무실을 썼고, 조직국 회의에 함께 참석하며 지방 간부 임명에 협력했다. 이 시기 스탈린과 시르초프의 관계는 긴밀한 실무 동맹이었다: 스탈린은 시르초프가 구축한 인사 통제 시스템을 통해 당 기구 전역으로 파벌적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시르초프 본인에게 이 시기는 후일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자신이 설계한 인사 통제 시스템이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고, 1930년 그가 바로 그 권력 집중을 비판하며 반대파를 조직했을 때, 그를 파괴한 것도 동일한 당 기구의 통제 시스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