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 체제 안에서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한 경찰사회주의의 창안자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896–1903 보안·정보·치안 · 러시아 제국
경력 연표
- 1886–1889모스크바 오흐라나의 비밀정보원으로 혁명조직 침투
- 1889–1896모스크바 오흐라나 특별임무관, 부국장으로 승진
- 1896–1902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 정치사찰 체계 근대화
- 1901–1903친정부 합법노조 설립 — '경찰사회주의' 주도
- 1902–1903경찰국 특별부장, 전국적 오흐라나 네트워크 구축
- 1903–1917플레베에 의해 해임·유배, 후일 사면받았으나 공직 복귀 거부
관련 역사 사건
'경찰사회주의'(주바톱시치나): 설계와 좌절
주바토프 구상의 출발점은 1896년 '모스크바 노동자 동맹'을 해산하고 심문한 경험이었다. 체포된 이들이 지식인 혁명가와 노동자로 갈리는데, 지식인은 왜 기소되는지 알았지만 노동자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노동자는 정치 혁명이 아니라 임금·근로조건이라는 일상의 문제에만 반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탄압만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막을 수는 없으며 노동대중을 혁명가의 손에서 빼앗으려면 정부 스스로 노동자의 경제투쟁 편에 서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898년 4월 트레포프에게 제출한 건의서를 바탕으로, 1901년 5월 모스크바에 '기계공업 노동자 상호부조회'가 허가되었다. 주바토프는 웹 부부·좀바르트의 노동조합 문헌을 노동자에게 읽히고, 티호미로프에게 대중 팸플릿을, 오제로프 등 모스크바대학 교수진에게 노동자 대상 강연을 맡겼다. 1901년 9월에는 공작원을 심은 '기계공업 노동자 평의회'를 세워 사찰과 중재를 동시에 꾀했다. 평의회는 공장주를 상대로 한 탄원을 대리하고, 1902년 2월에는 비단공장 파업을 한 달간 지휘하기까지 했다.
1902년 2월 19일 주바토프는 자신의 조합원 약 5만 명을 이콘과 깃발, 「하느님, 차르를 지키소서」 합창과 함께 모스크바 시내로 이끌어냈다. 당시 어떤 지하 혁명 조직도, 자유주의 반대파도 이만한 노동자 무리를 모을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사민주의 선전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소비에트 사학계조차 전성기에는 모스크바에서의 사민주의 선전이 '불가능'했다고 인정했다.
주바토프는 이 실험을 전국으로 확장했다. 민스크에서는 체포된 분트 청년들을 설득·전향시켜 1901년 7월 '유대 독립노동당'을 만들었고, 뒤이어 오데사에는 국제적 성격의 '독립노동그룹'을 세웠다. 1902년 가을 페테르부르크로 옮긴 뒤에는 지방 교회의 게오르기 가폰 신부를 노동자 조직에 끌어들여 큰 기대를 걸었으나, 가폰은 '영국식 노동조합처럼 노동자 스스로 운영해야 한다'며 경찰 결속을 거부했고 주바토프는 이를 '위험한 이단'으로 여겼다. 1903년 7월 오데사 총파업이 주바토프의 조합원들을 휩쓸며 정부가 통제 불능의 노동자 집회에 뒤덮이자, 내무장관 플레베는 실험의 중단을 명했고 주바토프는 해임·유배되었다. 그가 배양한 노동자 조직망은 가폰의 손으로 넘어가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을 향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