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 20년 총리에서 당 제1서기로 올랐다가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실무자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경력 연표
- 1936–1941옐스크 지역 중학교 벨라루스어·문학 교사
- 1941–1944스탈린그라드주 크라스냔스크 학교 교장 (대피)
- 1944–1952고멜 주당위 지도원 →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2–1955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5–195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59–1978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78–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3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후보위원
관련 역사 사건
민스크 메트로: 백만 도시의 벽을 넘다
1970년대 초 소련에서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만이 메트로를 건설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당시 민스크 인구는 85만 명에 불과했고, 스베르들롭스크, 트빌리시, 바쿠, 하리코프, 타슈켄트 등 이미 자격을 갖춘 도시들이 줄을 서 있었다. 키셀료프는 이 '백만 도시 규칙'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모스크바의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와 각료회의를 상대로 수년간 끈질긴 로비를 벌였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고도 실용적이었다: 민스크는 급속히 팽창하는 공업도시로서 교통난이 심각했고, 도시 구조상 지하철 없이는 장기적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민스크 인구는 곧 100만을 넘어설 것이었고, 키셀료프는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10년 뒤에는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77년, 마침내 소련 정부는 민스크 메트로 건설을 승인했고, 같은 해 6월 키셀료프는 직접 건설 현장에서 첫 돌을 놓았다. 그는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이 프로젝트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으며, 이후 모스크바로 승진해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이 된 뒤에도 민스크 메트로의 진행 상황을 계속 챙겼다. 첫 노선(모스크바선)은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984년에 개통되었고, 오늘날 민스크 메트로는 벨라루스 수도 교통의 중추로서 키셀료프의 가장 가시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 로비 과정에서 키셀료프는 벨라루스의 경제적 이해를 중앙에 관철시키는 전형적인 공화국 지도부의 행태를 보여주었다. 그가 확보한 또 하나의 대형 프로젝트인 즐로빈(즐로빈) 제철소의 경우, 모스크바 관료들을 설득해 당시 최신 오스트리아제 LD 전로(轉爐) 장비를 도입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는 연방 구성 공화국 지도자가 중앙 계획경제 체제 안에서도 상당한 협상력과 정치적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