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다 규이치

徳田球一
일본 일본 (오키나와) 1894–1953 ○ 망명 중 사망

18년 감옥에서 버틴 일본공산당 초대 서기장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50년 코민포름 비판과 무장투쟁 전환

1950년 1월 6일, 코민포름 기관지 《항구적 평화를 위하여,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는 '일본의 정세에 관하여'라는 논평을 게재했다. 실질적 저자는 스탈린으로, 노사카 산조(野坂参三)의 '평화혁명론'(미군 점령 하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무관하다"고 맹비판했다. 이는 소련이 일본공산당 노선을 급진화하려는 냉전 전략적 개입이었다.

도쿠다는 처음에 〈'일본의 정세에 관하여'에 관한 소감〉을 발표해 노사카를 옹호하고 저항했으나(《인민일보》 논평의 추가 압박을 받아), 제18차 확대중앙위원회(1950년 1월 18~21일)에서 결국 코민포름 비판을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미야모토 겐지(宮本顕治)의 '국제파'가 코민포름 비판의 전면 수용을 주장하며 도쿠다-노사카의 '소감파'(所感派)와 대립, '50년 문제'로 불리는 당 분열이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6일 맥아더 사령부의 공직추방령으로 도쿠다는 지하로 잠적, 10월 오사카항에서 중국으로 탈출해 베이징에 '베이징기관'(北京機関)을 세웠다. 1951년 4월 말 도쿠다는 노사카·니시자와 다카지(西沢隆二)와 함께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과 네 차례 회담했다. 스탈린은 쿤체보 별장에서 "점령군에게 일본을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고, 도쿠다 일행이 모스크바에서 작성한 '51년 강령'(동년 10월 제5회 전국협의회 채택, 《볼셰비키》 1951년 11월호 게재)은 의회주의를 폐기하고 폭력혁명 불가피론에 입각한 무장투쟁(중핵자위대·산촌공작대·화염병 투쟁 등)을 명문화했다.

1952년 베이징에서 개설한 비밀방송 '자유일본방송'을 통해 국내 투쟁을 지휘했으나, 무장투쟁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당을 고립시켰다. 도쿠다 사후 1955년 제6회 전국협의회(6전협)는 그가 주도한 노선을 '극좌모험주의'로 규정·폐기했고, 오늘날 일본공산당은 '50년 문제'를 '당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오류'로 평가하며, 도쿠다를 소련·중국의 간섭에 굴복해 당을 오도한 지도자로 공식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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