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공산주의의 공동 창건자, 코민테른에서 국가원수까지
1923년 9월 22일, 콜라로프는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무장봉기를 개시했다. 진압 후 잔여 대원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로 탈출, 궐석 사형 선고와 함께 22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공동 창건자이자 코민테른 서기장(1922~24). 1923년 9월 봉기를 직접 지휘했으나 실패로 22년간 소련에 망명했고, 귀국 후 국가원수와 총리를 지내며 불가리아의 스탈린화를 주도했다.
경력 연표
- 1897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입당
- 1904–1919플로브디프 테스냐키 조직 책임자
- 1905–1923중앙위원회 위원
- 1913–1923국민의회 의원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2–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장
- 19239월 반파시스트 봉기 공동 지도자
- 1928–1939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의장
- 1931–1941국제농업연구소 소장 (모스크바)
- 1946–1947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
- 1947–1949부총리 겸 외무장관
- 1949–1950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총리
1923년 9월 봉기와 디미트로프와의 동지적 관계
1923년 6월 불가리아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의 농민정부가 전복되자, 불가리아 공산당은 처음에 '중립' 입장을 취했다. 이에 코민테른은 지도부를 강하게 비판했고, 특히 스탈린은 '불가리아 공산당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을 요구할 정도였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장이었던 콜라로프는 이러한 노선 전환을 관철하기 위해 직접 불가리아로 비밀 귀국했다. 위조 서류로 체포되어 몇 주간 구금된 후 8월 초 소피아에 도착한 콜라로프는 알렉산드르 아브라모비치와 함께 8월 5~7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당의 입장을 급선회시켜 무장봉기 준비에 돌입하게 했다. 9월 15일 중앙위원회는 콜라로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토도르 루카노프, 토도르 페트로프를 봉기 지도부로 지정했고, 9월 17일 콜라로프와 디미트로프 단둘이 참석한 회의에서 22일을 봉기 개시일로 확정했다. 봉기는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나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콜라로프는 디미트로프와 함께 잔여 대원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 국경을 넘어 탈출했다. 궐석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이후 22년간 소련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9월 봉기의 패배는 콜라로프와 디미트로프 사이의 정치적 유대를 더욱 공고히 했으며, 이 동지 관계는 디미트로프가 1949년 사망할 때까지 불가리아 공산주의 운동의 중추로 작동했다. 봉기 자체는 실패했지만, 이후 공산권 역사서술에서 '세계 최초의 반파시스트 무장봉기'로 기념되었고, 콜라로프의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으로 남았다.
농민인터내셔널과 농업 문제 이론가
콜라로프는 1928년부터 1939년 해산까지 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동시에 모스크바 국제농업연구소 소장으로서 농업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지휘했다. 크레스틴테른은 1923년 코민테른 산하에 창설된 국제 농민 조직으로, 동유럽과 아시아의 급진적 농민 정당들과의 통일전선을 목표로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콜라로프는 특히 발칸 지역 소농 문제에 정통했으며, 불가리아가 전형적인 소농 국가라는 점에서 농촌 반프롤레타리아와 중농의 혁명적 잠재력에 주목했다. 그의 지도 아래 크레스틴테른은 기관지 『농민 인터내셔널』을 발행하고 국제농업연구소를 통해 농업 문제 연구서를 출간했으며, 이 연구소는 크레스틴테른 해산 후에도 1942년까지 존속했다. 농민 문제에 대한 그의 이론적 작업은 불가리아 공산주의가 도시 노동자뿐 아니라 농촌 대중에게도 호소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