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을 막은 소련 해군 잠수함 장교
토머스 블랜턴 미 국가안보기록보관소장은 그를 두고 "세계를 구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소련 해군 중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잠수함 B-59에서 핵어뢰 발사를 저지한 장교로, 두 명의 지휘관이 발사에 동의했으나 아르히포프만이 거부하여 핵전쟁을 막았다. 1961년 K-19 원자력 잠수함의 방사능 누출 사고에서도 승무원으로 복무하며 피폭을 입었다. 이후 69여단장, 37사단장을 거쳐 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8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경력 연표
- 1945태평양 함대 소해정에서 소련-일본 전쟁 참전 (사관생도)
- 1947카스피 고등해군학교 졸업
- 1961K-19 원자력 잠수함 부함장, 방사능 누출 사고 대응
- 1961–1964제69잠수함여단 참모장
- 1964–1968제69잠수함여단장
- c. 1968–1975제37잠수함사단장
- 1975소장 진급
- 1975–1985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
- 1981중장 진급
- 1988퇴역
관련 역사 사건
B-59함 핵어뢰 발사 저지 (1962)
1962년 10월 27일,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 아르히포프는 B-59 잠수함에 여단 참모장이자 부함장으로 승선하고 있었다. B-59는 소련이 쿠바에 파견한 4척의 폭스트롯급 디젤 잠수함 중 기함으로, 각 함정은 22발의 어뢰를 탑재했으며 그중 1발은 히로시마급 위력의 핵탄두 T-5 어뢰였다.
미 해군 항공모함 USS 랜돌프와 11척의 구축함이 B-59를 탐지하고 수면으로 강제 부상시키기 위해 수류탄형 신호폭뢰를 투하했다. 잠수함 내부는 며칠째 모스크바와 교신이 두절된 상태였고, 수심이 깊어 민간 라디오도 수신할 수 없었다. 냉방 장치는 고장 났고, 기온은 섭씨 37도를 넘었으며 이산화탄소 농도가 치솟아 승조원들이 실신하기 시작했다. 함장 발렌틴 사비츠키는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판단하고 핵어뢰 장전을 명령하며 "우리는 죽겠지만 그들을 모두 격침시킬 것이다. 해군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통상 소련 핵무장 잠수함에서는 함장과 정치장교 두 명의 승인만으로 핵발사가 가능했으나, B-59에는 아르히포프가 여단 참모장으로서 세 번째 승인권자로 탑승하고 있었다. 함장 사비츠키와 정치장교 이반 마슬렌니코프가 발사에 동의한 가운데, 아르히포프만이 이를 거부했다. 그는 미군의 폭뢰가 공격이 아니라 부상 신호일 가능성을 지적하며, 모스크바의 명령 없이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결국 B-59는 부상하여 미 구축함 USS 코니와 교신했고, 이후 소련 함대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았다.
아르히포프의 이 판단으로 핵전쟁은 막을 내렸다. 2002년 로버트 맥나마라 전 미 국방장관은 "우리가 당시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핵전쟁에 가까이 갔었다"고 증언했으며,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는 이를 두고 "냉전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일 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미 국가안보기록보관소 토머스 블랜턴 소장은 2002년 아르히포프를 가리켜 "세계를 구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B-59의 핵어뢰 탑재 사실은 2002년 하바나 회의까지 기밀로 유지되었다. 소련으로 귀환한 후 승조원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질책을 받았고, 아르히포프는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