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을 무기로 바꾼 인민위원
1939년 10월 소련 지도부는 석탄공업인민위원부를 신설하고 바흐루셰프를 초대 위원으로 임명했다 — 그는 이미 러시아공화국 총리였다. 한 사람에게 정부 수반과 전략 산업을 동시에 맡긴 것은 전운 속에서 석탄이 곧 총력전의 연료라는 판단이었다.
툴라의 자물쇠공 견습공에서 출발해 러시아 공화국 정부 수반과 소련 최초의 석탄공업인민위원을 겸임한 산업 행정가. 1939년 신설된 석탄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쟁 발발 후 돈바스의 채탄 설비를 동부로 대피시키고 쿠즈바스·카라간다에 새 탄전을 열었으며, 1943년 전시 연료 공급의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폐허가 된 돈바스 탄광 복구를 지휘하던 중 집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그 공로는 크렘린 벽 묘지 안장으로 기려졌다.
경력 연표
- 1917–19툴라 「사회주의자」 공장 사령관 · 부소장
- 1919–21붉은군대 서부전선 정치국 선동원
- 1923–26툴라 현 형사수사국장
- 1927–31코소고르스크 제철소장: 제2고로 복구, 광산 개발
- 1931–36카시라 화력발전소장 (당시 소련 최대)
- 1937–38러시아공화국 지방공업인민위원
- 1939–40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46소련 석탄공업인민위원(초대): 전시 탄광 대피·증산
- 1946–47소련 서부지역 석탄공업장관: 돈바스 복구 지휘
관련 역사 사건
전시 석탄 대피와 동부 탄전 개발
1941년 독일군의 진격으로 소련 석탄 생산의 핵심인 돈바스가 위협받자, 바흐루셰프는 석탄공업인민위원으로서 전례 없는 산업 대피 작전을 지휘했다. 돈바스의 채탄 설비와 광부들을 쿠즈바스(쿠즈네츠크 탄전)와 카라간다, 우랄 지역으로 철수시키는 한편, 동부에서 새 탄갱을 개설하고 노천 채탄을 확대했다. 1942년 한 해에만 동부 지역의 석탄 생산량은 전쟁 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고, 1943년에는 쿠즈바스가 돈바스를 대체하여 소련 최대의 탄전으로 부상했다.
이 작전은 단순한 대피가 아니라 전시 경제의 동맥을 재건하는 작업이었다. 모스크바와 우랄의 방위산업, 철도, 발전소는 석탄 없이는 가동될 수 없었다. 바흐루셰프는 개인적으로 탄광을 시찰하며 생산 목표를 감독했고, 1943년 9월 30일 전시 연료 공급을 보장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았다. 전후에는 서부지역 석탄공업장관으로서 폐허가 된 돈바스 탄광 복구를 지휘했으나, 1947년 1월 모스크바 집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