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우크라이나를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화국 건설자, 드네프르 클랜의 핵심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경력 연표
- 1941–1945화학방호군 장교, 자캅카스 전선 복무, 대위 제대
- 1946–1952드네프로제르진스크 코크스화학공장·금속공장 당비서 및 당 간부
- 1952–1954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5–1957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7–196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61–1963, 1965–1972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72–19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71–1989CPSU 중앙위 정치국 정위원 (1961–1963, 1965–1971 후보위원)
관련 역사 사건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 건설
셰르비츠키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낸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경제 규모는 약 4배 성장했고 공업 생산은 5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의 지도 아래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가 조기 완공되었고,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의 유즈마시(남부기계제작공장)는 소련의 우주·로켓 산업을 떠받치는 핵심 기업으로 도약했다. 심페로폴-알루슈타-얄타 간 산악도로가 재건되고 크림 반도에 트롤리버스 정기 노선이 개통되는 등 교통 인프라도 현대화되었다. 농업 부문에서는 콜호스의 부채를 탕감하고 축산물 수매 가격을 평균 35% 인상했으며, 1980년대 말에는 연간 5,100만 톤의 곡물을 생산하여 1인당 1톤 이상을 기록했다. 드네프르 강변의 공업 벨트에서 성장한 그는 에너지 전력부를 신설하고 방위·소비재·건설 부문을 아우르는 공화국 차원의 산업 정책을 체계화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우크라이나 SSR 인구는 4,310만 명에서 5,200만 명으로 증가했다. 문화적으로는 전체 학교의 약 60%가 우크라이나어로 운영되었고, 국립 무용단과 민속 합창단이 육성되었으며, 발레리 로바놉스키를 영입한 키예프 디나모는 소련 최고의 축구 클럽으로 부상했다.
우크라이나 경제의 황금기: 셰르비츠키 시대의 산업화와 성장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지구에서 성장한 셰르비츠키에게 산업화는 정치적 신념이자 삶의 경험이었다. 그가 우크라이나를 이끈 1972년부터 1989년까지 공화국의 산업 생산량은 약 5배 증가했고, 농업 생산량은 2배로 늘어 1980년대 말에는 연간 5,100만 톤의 곡물을 수확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전체 철광석의 52%, 석탄의 27%, 철강의 35%를 생산했고, 야금 장비의 45%, 간선 디젤기관차의 95%, 트랙터의 24%, 설탕의 50% 이상을 담당하는 연방의 공업 중심지였다. 300여 개 산업 분야를 갖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항공기·로켓·선박에서 식품가공까지 광범위한 첨단 제품을 생산했다. 인구는 4,300만에서 5,200만으로 증가했고, 1961–1980년 사이에 약 3억 8,000만 제곱미터의 주택이 건설되어 3,440만 명이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드네프르 인맥을 활용해 모스크바와의 관계 속에서 공화국 이익을 관철시킨 셰르비츠키의 실용주의는, 소비에트 체제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우크라이나에 전례 없는 물질적 번영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