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라 방어전을 지휘하고 몰락한 NKVD 소장
1941년 가을, 서른넷의 수호돌스키는 자보론코프, 치무토프와 함께 툴라 시 방위위원회 3인에 올랐다. 전선의 붉은 군대가 철수한 텅 빈 도시에서, 그가 조직한 노동자 연대와 파르티잔 부대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45일간 막아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에서 복무한 장교로,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결정적 시기에 툴라 주 NKVD 국장을 맡았다. 툴라 시 방위위원회 위원으로서 노동자 대대와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하고 시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후방에서 압베어(Abwehr) 첩보망을 무력화했다. 전후 보로네시 주 MGB 국장과 불가리아 주재 소련 고문을 지냈다. 1950년 보로네시에서 발생한 청년 반스탈린 조직 'KPM' 사건을 처리한 책임으로 1957년 당에서 제명되고 소장 계급을 박탈당했으며, 사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
경력 연표
- 1924–1931툴라 무기 공장 노동자, 라브파크 야간부 수료
- 1931–1935모스크바 항공대학 입학 후 툴라 기계연구소 편입, 기계공학사
- 1935–1938제173공장 기술자·선임 설계사
- 1938–1939NKVD 중앙학교 졸업, GUGB 1국 8과 작전관
- 1939–1940NKVD 경제총국(GEMU) 1과 부과장
- 1940–1941에스토니아 SSR NKVD/NKGB 경제과 부과장
- 1941.4–7툴라 주 NKGB 국장
- 1941–1943툴라 주 NKVD 국장 겸 시 방위위원회 위원
- 1943–1946툴라 주 NKGB/MGB 국장
- 1946–1951보로네시 주 MGB 국장
- 1951–1955불가리아 내무부 주재 MGB/MVD/KGB 수석 고문
- 1956질병으로 예편
관련 역사 사건
KPM 사건과 몰락
1948년 가을부터 1949년 여름까지 보로네시에서는 '청년공산당'(KPM)이라는 지하 조직이 활동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약 60명으로 구성된 이 조직은 소련을 '레닌주의 원칙'으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스탈린과 그 측근들의 강제 축출 가능성을 비밀 강령에 포함했다. 훗날 시인 아나톨리 지굴린이 이 조직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1949년 9월부터 보로네시 주 MGB는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약 30명을 체포했다. 당시 보로네시 주 MGB 국장이던 수호돌스키는 이 사건의 총괄 책임자였다. 1950년 6월, MGB 특별회의는 지굴린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고, 다른 구성원들도 중형을 받았다. 수호돌스키는 1951년 가을까지 보로네시 주 MGB 국장직을 유지하다 불가리아 주재 고문으로 발령났다.
1953년 스탈린 사후 해빙기가 도래하자 KPM 사건 처리는 문제가 되었다. 1956년 지굴린은 완전히 복권되었고, 수호돌스키는 같은 해 2월 질병을 이유로 KGB에서 예편했다. 이듬해 3월 23일 그는 당에서 제명되었고, 9월 3일 소련 각료회의 결정 제1068호에 따라 소장 계급을 박탈당했다. 사망 이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