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리를 도우려다 유탄에 쓰러진 37세 경제학자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코마리를 도우러 달려갔다. 사수가 경고 사격을 했지만 우소프는 멈추지 않았고, 곧 유탄이 그를 스쳤다.
농업경제학을 전공하고 모스크바 합작기업 이콤에서 경제학자로 일한 평범한 시민이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드미트리 코마리를 도우려 달려가다 유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사흘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를 포함한 세 희생자에게 소련 최후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72스탈린 농업기술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 1978–1980해군 해안통신부대 복무 (하사)
- ~1990–1991모스크바 합작기업 '이콤' 경제학자
- 1991.08.218월 쿠데타 당시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백악관 방어 중 사망
관련 역사 사건
차이콥스키 터널의 마지막 밤
1991년 8월 19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모스크바에는 통행금지가 내려졌고, 타만 사단의 장갑차 부대가 시내를 순찰하기 시작했다. 옐친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백악관(러시아 최고회의 건물) 주변과 정원환상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20일 밤에서 21일 새벽으로 넘어갈 무렵, 차이콥스키 거리와 칼리닌 대로가 만나는 터널 입구에서 타만 사단 15연대의 BMP 장갑차 8대가 바리케이드에 가로막혔다. BMP 536호 위로 뛰어올라 관측창을 방수포로 가리려던 드미트리 코마리를 도우려, 우소프는 사수의 경고 사격에도 멈추지 않고 달려갔다. 그는 차량 해치에 맞아 튕긴 유탄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졌다.
그의 죽음의 정황은 이후 논쟁의 대상이 됐다. 공식 수사는 사수가 쏜 경고 사격이 해치에 맞고 튕겨 명중했다고 보았고, 1991년 12월 모스크바 검찰청은 승무원들에 대한 형사 사건을 범죄 구성요건 부재로 종결했다. 반면 목격자였던 「콤메르산트」 기자와 쿠데타 가담자 측 변호인은 우소프가 궤도에 깔려 숨졌다는 다른 판본을 제기하기도 했다.
8월 24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소련 헌정 질서 수호에서 보인 용기와 시민적 용기를 들어 우소프 등 세 희생자에게 사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그는 이 칭호를 마지막으로 받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이듬해 옐친 대통령은 세 사람에게 러시아 최초로 제정된 국가 훈장 '자유 러시아의 수호자' 메달을 안겼다. 우소프는 바간코보 묘지에 묻혔고, 사건 현장인 신아르바트 터널 입구에는 세 희생자의 기념비가 서 있어 오늘날에도 매년 8월 추모 행사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