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르 체제를 지키려 "작은 승리의 전쟁"을 요구한 최후의 강경파 내무장관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881–1884 보안·정보·치안 · 러시아 제국
경력 연표
- 1867법무부 입부, 검사보로 임관
- 1879페테르부르크 사법부 검사
- 1881경찰국장
- 1884원로원 의원
- 1885내무차관
- 1894국무장관 겸 법전편찬 총괄
- 1899핀란드 대공국 담당 장관-국무비서관
- 1902내무장관 겸 헌병단장
관련 역사 사건
1902년 농민 봉기와 경찰·행정 통제
1902년 3월 폴타바·하르키우주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174개 공동체와 약 3만 8천 명의 농민에게 영향을 미쳤고, 약 2주 동안 이어졌다. 봉기는 폴타바주의 카를리우카 대영지에서 시작되어 인근 지역으로 번졌다. 농민들은 곡물·감자·가축·농기구 등을 약탈했고, 일부 농가와 지주 저택을 훼손했으며, 하르키우주의 설탕 정제시설도 공격했다. 당시 카를리우카 영지는 15만 에이커가 넘는 규모로, 현지 농민들이 감자 흉작 뒤 토지 임대에 의존한 상황에서 사탕무 재배와 식품 가공업이 토지 이용을 둘러싼 갈등을 키웠다는 분석이 제기되어 있다. 봉기는 여러 군부대의 투입으로 진압되었으며, 참가자들의 재판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플레베는 내무장관 취임 직후 이 농촌 소요를 통제해야 할 과제로 맞았다. 그는 세르게이 주바토프와 협력해 비밀요원을 혁명·노동 단체에 침투시키는 보안부서 네트워크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경찰 후원 노동자 조직이 1903년 광범위한 파업을 촉발하자 주바토프를 해임했고, 자유주의 언론과 젬스트보 지방자치기관을 탄압했다. 그 결과 공적 인사들과 충돌하고 정부 안에서도 세르게이 비테와 대립했다. 이 정책은 농민 봉기의 토지·생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감시와 행정적 억압으로 사회적 동요를 다루려는 통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