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간 소련 핵무기 설계국을 이끈 수석설계자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 하리톤은 모든 문서의 글자 하나까지 증거를 요구했다. "어차피 전쟁하지도 않을 텐데"라는 말에 그는 분노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전부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과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계산했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서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과 1953년 첫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세 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경력 연표
- 1921–1931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세묘노프 지도)
- 1926–1928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수 (러더퍼드·채드윅)
- 1931–1946화학물리연구소 폭발물 연구실장
- 1939–1941젤도비치와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계산
- 1946–1992KB-11(아르자마스-16)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
- 1953–199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92–1996VNIIEF 명예 과학책임자
관련 역사 사건
핵물리학의 선구자: 연쇄반응의 최초 계산
하리톤이 소련 핵무기 계획의 수석설계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26–1928년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제임스 채드윅의 지도 아래 알파입자 섬광 계수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소련에서 보기 드문 실험 핵물리학 훈련을 받은 과학자였다. 귀국 후 물리기술연구소에서 니콜라이 세묘노프와 함께 폭발물의 연쇄 화학반응을 연구하며 연쇄반응의 물리학에 깊이 천착했다. 1937년에는 이미 우라늄 동위원소의 원심분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U-235가 U-238보다 중성자 활성이 높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결정적인 돌파구는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의 공동 연구였다. 두 사람은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의 조건을 세계 최초로 정량적으로 계산했으며, 그 결과를 ЖЭТФ에 연속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연구는 연쇄반응의 임계조건, 중성자 증배율, 그리고 빠른 중성자와 감속 중성자 체계의 차이를 정밀하게 규명한 선구적 업적이었다. 독소전쟁 발발로 핵 연구는 중단되었고 하리톤의 실험실은 재래식 무기 개발에 투입되었으나, 1942년 초 게오르기 플료로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독일과 미국이 이미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으며 소련의 핵 연구 재개가 시급하다는 내용)가 계기를 만들었다. 1943년 이고리 쿠르차토프가 하리톤에게 핵장약 설계 책임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20년 가까운 연쇄반응 연구로 축적된 과학적 권위에 기초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소련 핵무기 계획의 과학적 지휘
1946년 하리톤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 임명되어 1992년까지 46년간 이 자리를 지켰다. 옛 수도원 부지에 세워진 이 폐쇄도시 사로프에서 소련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그의 지도 아래 극비리에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첫 과제는 미국의 플루토늄 내폭형 설계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클라우스 푹스가 전달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리톤·쿠르차토프·알리하노프·키코인 등 단 네 명만이 전체 설계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49년 8월 29일 RDS-1(미국식 복제)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성공적으로 폭발하며 소련의 핵 독점 종식을 알렸다. 하리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미국인들에게 우리도 더 진보되고 더 강력한 우리 자신의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과제를 설정했다. 그 결과 1953년 8월 12일, 세계 최초의 진정한 수소폭탄 RDS-6s(사하로프의 '슬로이카' 설계)가 폭발했고, 이는 소련의 독자적 핵심 능력을 입증한 성취였다. 이후 하리톤은 핵탄두의 소형화, 고출력화, 신뢰성 향상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며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지속적으로 갱신했다. 베리야의 특별위원회가 제공한 거의 무제한의 자원과 강압적 통제 아래에서도, 하리톤은 물리학적 엄밀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는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