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체제 인권운동가에서 그루지야의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민족주의자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54지하 청년 조직 '고르가슬리아니' 창립
- 1963–1977트빌리시 국립대학 영문학 강사, 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 연구원
- 1977–1979그루지야 헬싱키 그룹 공동 창립, 체포·수감 후 공개 '참회'로 감형
- 1988–1990성 일리아 의인회 공동 의장,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
- 1990–1991그루지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1–1992그루지야 공화국 대통령
관련 역사 사건
독립국가의 권력 집중과 내전
감사후르디아는 소련 체제 안의 선거·의회 경로를 통해 독립을 추진했다. 1990년 10월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뒤, 1991년 3월 31일 주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0%가 투표하고 98%가 독립 회복에 찬성했다. 그는 4월 의회에 독립 선언을 제출했고, 227명 전원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5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투표 가능 유권자의 83.4%가 참여해 그중 86.5%가 그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나 취임 당시 대통령직에는 법률 거부권과 계엄 선포권, 총리·법원장·검찰총장·군 지휘부 임명권 등 넓은 권한이 부여되었다.
새 정부는 의회 밖의 무장조직을 통제하려 했으나, 국가방위군 지휘권과 군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 갈등도 커졌다. 1991년 8월 감사후르디아는 국가방위군을 내무부 관할로 옮기고 지휘관 텡기즈 키토바니를 해임했다. 키토바니는 병력을 이끌고 트빌리시를 떠났고, 총리 텡기즈 시구아 등도 야권에 합류했다. 9월에는 반대파 시위가 격화했고, 경찰이 시위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감사후르디아 정부는 야당 인사들을 체포하고 11월 비상사태 아래 정당 활동을 중지시켰다. 휴먼라이츠워치는 1991년 12월 보고서에서 언론·집회 자유 침해와 정치적 구금, 구금자 고문·학대, 남오세티야인에 대한 무장 공격 묵인 또는 지원을 문서화했다. 이는 인권단체의 조사 결과이며, 보고서는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는 데 반대하고 느슨하게 결집한 야권의 인권 준수 여부는 평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키토바니의 반란군과 감사후르디아 충성파 사이의 전투는 1991년 12월 22일부터 1992년 1월 6일까지 의회 건물 포위전을 중심으로 트빌리시에서 벌어졌다. 감사후르디아는 축출되어 체첸으로 떠났고, 키토바니·자바 이오셀리아니·시구아가 이끄는 군사평의회가 수도를 장악했다. 그루지야 의회는 2005년 이 사태를 위헌적 무장 쿠데타로 규정했다. 쿠데타는 뒤이은 내전의 발단이 되었으며, 독립을 이끈 감사후르디아 정부의 권력 집중과 반대파 탄압, 그리고 그를 무력으로 제거한 세력의 행동을 함께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