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재건의 주역, 남조선로동당 당수
1927년 신의주 법정에서 광인을 가장해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극단적 연기로 병보석을 얻어내고, 곧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까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으나, 월북 후 김일성에게 밀려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숙청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입당, 상하이에서 활동
- 1922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원동인민대표대회 참석
- 1925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8–1930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40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활동; 상하이·국내 지하운동 지도
- 1945조선공산당 재건, 당수 겸 서기장 취임
- 1946–1949남조선로동당 창당, 부위원장(사실상 당수)
- 1948–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초대 외무상
1946년 신민당·공산당 합당을 이끈 연안파 지도자이자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공산주의자
1956년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소련파의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했고, 이후 연안파는 투옥·연금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항일군정대학 교관·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신민당 부주석,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재정상·부수상을 역임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뒤 숙청·수감되었으며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96–1957, 영어 위키백과는 1896–1960, 소련 문서는 1898년생으로 기록한다. 정확한 생몰연도와 사망 경위에는 이설이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귀국해 조선노동공제회·고려공산청년동맹에 참여
- 1928–1935'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간 수감, 1935년 출옥
- 1936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
- 1938조선청년전위동맹 조직,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같은 해 말 옌안으로 이동해 항일군정대학 교관
- 1942화북조선독립동맹 창건, 중앙상무위원 겸 서기부장
- 1945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 1946.02조선신민당 부주석 (주석 김두봉)
- 1946.08신민당·조선공산당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 결성,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 1947.02북조선인민위원회 인민검열국장
- 1948.04남북협상 참여
- 1948–1952재정상
- 1952–1953내각 부수상
- 1953.02부수상 겸 재정상
- 1955국가검열상 (검열국장)
- 1956.08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비판, 9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 복귀 결정
- 1957.09제명·숙청 후 평양에 수감. 사망 시점에는 1957년설과 1960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