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들은 크론시타트 봉기를 백위대 음모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이름을 이용했다. 내가 요새에 있던 유일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 포병 장교로 30년간 복무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베리아 포병 여단을 지휘했다. 2월 혁명 후 예편했다가 1918년 붉은 군대에 군사전문가로 입대했고, 1920년 12월 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당시 봉기군의 방어를 조직했으나, 볼셰비키는 3월 2일 포고에서 봉기를 '코즐롭스키 전 장군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외자로 선언했으며, 가족과 지인 27명을 인질로 체포했다. 봉기 진압 후 8천여 명의 크론시타트 수병과 함께 핀란드로 탈출했고, 망명지에서 교사와 정비공으로 일하다 1940년 헬싱키에서 사망했다.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1883년 오룔의 세습 귀족 장교 집안에서 태어나 니콜라이 군사아카데미를 마치고 참모본부 장교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단 참모장 직무를 맡았다. 1918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에, 1919년 갈리치아군에 복무했다. 1920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제10사단과 제3군을 지휘했고, 1921년 투하쳅스키 아래 탐보프 진압군 참모장으로서 독가스 사용을 명한 명령 제0116호에 서명했다. 같은 해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3년 붉은 군대 참모부 내전사 부장이 되어 세 권짜리 내전사를 썼다. 1930년 체포되어 1936년 야로슬라블 감옥에서 숨졌다.
예니세이현의 파르티잔군을 이끌고 1921년 몽골에서 운게른을 넘겨받은 시베리아 파르티잔 지휘관
1884년 랴잔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로 일했고, 1906년 징집되어 아친스크의 제29 시베리아 소총연대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 네 개를 모두 받아 장교가 되었고 1917년 이등대위에 올랐다. 1918년 3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아친스크가 백군에 넘어가자 지하로 들어가 1919년 1월 파르티잔 활동을 시작했다. 다른 파르티잔 부대와 합친 파르티잔군의 참모장으로 타이가를 700킬로미터 행군해 9월 미누신스크를 차지했다. 1921년 8월 그의 부대가 몽골에서 운게른을 넘겨받았다. 그 뒤 시베리아 국경수비대 참모장을 지냈고, 몽골 군사 고문으로 있던 1927년 울란바토르에서 숨졌다. 사인은 출처마다 엇갈린다.
1920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를 점령했다가 주민과 포로를 처형하고 불태운 극동의 파르티잔 지휘관
1897년 블라디미르현 무롬군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기관사 조수로 일했다. 1916년 징집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준위까지 올랐고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두 번 받았다. 1918년 적위대에 들어가 사마라 봉기 진압에 참여했고, 1919년 연해주에서 자기 파르티잔 부대를 꾸렸다. 11월 35명으로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로 진군을 시작해 니콜라옙스크 전선 사령관이 되었고, 1920년 2월 도시에 들어간 뒤 3월 일본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이겼다. 5월 말 일본 원군이 다가오자 남은 포로를 모두 처형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7월 케르비에서 참모들과 함께 체포되어 즉석 재판 끝에 9일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