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4월 27일 첫 국가두마 개회사: "국가두마에 경의를 표합니다. 위대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민의 의지가 불변의 법에 기초한 입법 기관으로 표현됩니다."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창립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무롬체프는 러시아 헌정주의의 얼굴이었다.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법사회학을 개척했고, 법률학회 회장으로 사법 개혁을 주도했다. 1906년 제1대 국가두마 의장에 당선되어(426/436표) 러시아 최초의 입헌적 대의기관을 이끌었으나, 의회 해산 후 비보르크 호소에 서명해 수감되었다. 1910년 그의 장례식은 1905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체제 시위로, 헌정사에 신화로 남았다.
푸리슈케비치 씨가 무라비요프의 목걸이라 부르는 그것을, 그의 후손들은 아마도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트베리 지방의 진보적 젬스트보 활동가로 출발해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에 참여했고 4회 연속 국가두마 의원을 지낸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이다. 두마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불렸으며, 1907년 11월 17일 연단에서 스톨리핀의 야전군법회의를 비판하며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을 남겨 격분한 총리의 결투 신청을 받고 사과해야 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핀란드 담당 위원을 지냈고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백군 진영에 가담했으며, 패배 후 망명하여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05–1917.0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1917.03–0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1917.0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1918–19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1921–19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1923–19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1917년 5월 16일, 군산업위원회 대회 연설에서 그는 경고했다: "반국가적 경향이, 대중을 최면에 빠뜨리는 구호로 자신의 본질을 위장하며, 러시아를 거대한 걸음으로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최대 섬유 자본가 중 한 명으로, 1900년에 이미 9시간 노동제와 노동자 주택·학교·병원을 도입한 선구적 산업가였다. 진보당 창립자이자 4대 두마 부의장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진보블록을 조직하여 차르 체제에 맞선 의회 반대파의 중심에 섰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부 장관을 두 차례 지냈고, 마지막 내각에서는 케렌스키의 부총리로서 10월 혁명 당일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각료 회의를 주재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밀류코프의 『최신소식』 발행을 이끌며 러시아 망명 사회의 좌파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97–1905가업인 콘스탄틴 직물 공장 경영, 1900년 9시간 노동제·노동자 주택·학교·병원 도입
1905–1912통상산업당 공동 창립, 모스크바 증권거래소 부위원장
1912–1914진보당 공동 창립, 4대 두마 의원(코스트로마), 두마 부의장
1915–1917.02중앙군산업위원회 부의장, 진보블록 조직, 두마 임시위원회 위원
1917.03–05임시정부 통상산업부 장관(1차), 노사 타협 추진하다 사임
1917.09–10부총리 겸 통상산업부 장관, 10월 25일 겨울궁전에서 각료 회의 주재 중 체포
1919년 9월 22일,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녹스 장군이 내게 왔다. 처칠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지원하라고 훈령했다.」 붕괴 직전의 정권 내막을 기록한 총리의 목소리다.
제정 러시아의 카데트당 소속 두마 의원으로, 1918년 11월 옴스크에서 군사 쿠데타를 조직해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최고 통치자'로 추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콜차크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 각료회의 의장(총리)에 임명되어 붕괴 직전의 백색 정부를 이끌었고, 정권의 유일한 충성파 정치인으로서 최후까지 콜차크 곁에 남았다. 1920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의해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정치중앙에 넘겨졌고, 2월 7일 새벽 레닌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재판 없이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