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비아의 독일계 농가에서 태어나 빈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07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민족 문제에서 「개인적 자치」를 내세운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레닌과 스탈린의 비판을 받았다. 1918년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첫 총리가 되어 대연정을 이끌며 8시간 노동제 등을 도입했고, 생제르맹 조약으로 독일과의 합병 금지와 영토 상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1938년 합병을 지지했다. 1945년 4월 소련군의 지시로 임시정부를 세웠고 그해 대통령이 되었다. 1950년 빈에서 죽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마지막 원수로, 1919년 8월 잠시 헝가리 섭정을 자처한 합스부르크 대공
헝가리의 얼추트에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헝가리(팔라틴) 분가에서 태어났다. 1890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과 군, 집단군을 지휘했고, 1918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마지막 원수가 되었다. 10월 27일 카를 황제가 그를 헝가리의 전권 대리인(호모 레기우스)으로 삼았으나 과꽃 혁명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1919년 8월 카를을 대신하는 섭정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어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협상국이 합스부르크가의 국가원수를 인정하지 않아 8월 23일 물러났다. 호르티 시대에는 1936~1944년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44년 헝가리를 떠났고 1962년 서독의 라인에서 죽었다.
우이페슈트의 독일계 개신교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6년 루도비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빈 군사대학을 마쳤으며, 1913년 헝가리군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빈 군사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9년 1월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국방차관으로 군 조직을 맡았다. 평의회 공화국 시기인 4월 21일 붉은군대 참모장이 되어 미슈콜츠 부근에서 승리하고 북부 원정을 이끌었으나, 7월 3일 클레망소 각서 수락과 철수 명령에 항의해 사임했다. 붕괴 뒤 체포되어 1920년 반역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1925년부터 불법 공산당원이었다. 1927년 죽었고 1945년 사후 상급대장으로 추서되었다.
1916년 11월 큰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황제(카를 1세)이자 헝가리 국왕(카를 4세)이 되었다. 연합국과 비밀 평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1918년 가을 제국은 해체되었다. 11월 11일 오스트리아에서, 13일 헝가리에서 국정 참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나 퇴위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1919년 스위스로 망명한 뒤 1921년 3월과 10월 두 차례 헝가리 왕위 회복을 시도했으나 섭정 호르티의 반대로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 뒤 체포되어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으로 유배되었고 1922년 그곳에서 호흡부전으로 죽었다. 2004년 가톨릭교회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의회를 정지시키고 조국전선 일당 독재를 세웠으며 1934년 나치 쿠데타 중 암살된 오스트리아 총리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에서 37개월 복무했다. 니더외스터라이히 농민연맹에서 일하며 농업 정책 전문가로 이름을 얻었고, 1931년 농림장관, 1932년 5월 연방 총리가 되었다. 1933년 3월 의회를 정지시키고 긴급명령으로 통치했으며, 공산당과 나치당에 이어 사회민주당까지 금지하고 이탈리아 파시즘을 본뜬 조국전선 일당 독재를 세웠다. 1934년 2월 내전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짓밟았고, 3월 무솔리니·굄뵈시와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다. 1934년 7월 25일 나치 쿠데타 시도 중 총리 관저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