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점령 뒤 대통령 직무를 맡은 에스토니아의 마지막 헌법상 총리, 1944년 티에프 정부를 세운 법학자
에스토니아현 키르블라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944년까지 타르투 대학에서 로마법과 에스토니아법을 가르쳤다. 『포스티메스』 편집장과 하원의장을 거쳐 1939년부터 1940년 6월 소련군이 들어올 때까지 총리였고, 콘스탄틴 페츠 대통령이 소련에 체포되자 헌법에 따라 대통령 직무를 맡은 총리가 되었다. 1941년 7월 29일 독일군에 독립 정부 수립을 청했다가 거절당했고, 자치행정 수장 제안은 거부했다. 1944년 2월 7일 라디오로 징집에 응하라고 호소했고 3만 8,000명이 등록했다. 6월 오토 티에프를 부총리로 임명했고, 9월 독일군이 물러나자 티에프 정부를 세웠다. 그 뒤 스웨덴으로 건너갔고 1945년 1월 위암으로 숨졌다.
1940년 즈다노프의 강요로 에스토니아 괴뢰 정부의 총리가 되어 소련 편입을 청원한 시인·의사
비리얀디 근처의 농가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뒤에 요하네스 바르바루스라는 필명의 이름난 시인이자 급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40년 6월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자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콘스탄틴 페츠 대통령에게 바레스를 괴뢰 정부의 총리로 임명하게 했고, 그는 모스크바에 가입 청원을 전한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후 에스토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을 지냈고, 1941년 독일군이 오자 소련 내지로 피했다. 1944년 돌아와 독립전쟁 시기 행적으로 NKVD의 조사를 받았고, 1946년 11월 탈린의 관저에서 숨졌다. 자살로 여겨지지만 살해설도 있다.
루키야노프가 '반헌법적 행위'로 10년형을 경고하자, 뤼텔은 버티며 말했다. '우리는 최고회의를 소집해 독립 선언을 표결에 부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주권 선언'이 아닌 '독립 선언'이라고 말해 버렸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에스토니아 사레마 섬 출신의 농업경제학자로,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과 공산당 간부를 거쳐 1983년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198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투옥 위협을 무릅쓰고 주권 선언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소련 해체의 첫 균열을 냈고, 1990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소련 통치의 불법성을 선언하고 독립 회복 이행기를 이끌었다. 1991년 독립 후 2001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6년까지 재임하며 NATO와 EU 가입을 성사시켰다.
TV 토론에 서류 가방을 들고 나와 상대가 반박할 때마다 해당 문서를 꺼내 사실을 입증하곤 했다.
에스토니아의 물리화학자이자 정치인. 탈린공과대학에서 유혈암 기술을 전공한 뒤 소련권 최초로 NMR 분광계를 자체 제작하며 고체 고분해능 핵자기공명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시절 1987년 인산염 광산 계획의 환경·인구적 위험을 보고서로 폭로해 '인산염 전쟁'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고, 소련 인민대의원으로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를 발굴·공개해 발트 병합의 법적 근거를 무너뜨렸으며, 독립 회복 후 두 차례 장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