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사회주의 언론인에서 출발한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민족주의 혁명으로 전향해 파시즘을 창시했다. 그는 1922년 로마 진군 뒤 총리가 되었고, 폭력과 제도 개편으로 자유주의 체제를 일당 독재로 바꾸었다. 식민 전쟁과 나치 독일과의 동맹,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탈리아를 심각한 군사적·정치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1943년 실각한 뒤 독일 점령지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이끌었으나, 1945년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43년 7월 25일 새벽, 그란디 결의안은 19 대 8로 통과되어 무솔리니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렸다.
디노 그란디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의 지도자이자 외교관으로, 정권의 핵심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외무장관과 런던 대사를 지내며 전쟁 확대에 신중한 외교 노선을 추구했지만 파시스트 국가의 제도와 정책을 집행한 책임도 지녔다. 1943년 7월 시칠리아 침공 뒤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국왕에게 헌정상 군 통수권을 돌려주자는 결의안을 작성하고 표결을 조직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축출을 이끌었다. 이후 망명했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법정에서 궐석 사형을 선고받았다.
1943년 7월 25일, 치아노는 장인 무솔리니의 축출을 뜻하는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핵심 외교관으로, 정권의 팽창과 독일 의존을 추진하면서도 전쟁의 파국이 다가오자 그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전쟁과 알바니아 침공, 그리스 공격을 지지했으며 외무장관 재임 중 외교 기록과 일기를 남겼다. 1943년 7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디노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해 무솔리니 축출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특권적 지위가 보존될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독일로 달아났다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 넘겨진 그는 베로나 재판 뒤 처형되었고, 그의 일기는 파시즘 내부의 책임과 붕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