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치아 메디니의 유대인 가정에서 이자크 플라이슈파르브로 태어나 크라쿠프에서 제화공으로 일했고, 시온주의 단체를 거쳐 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1939년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탈출했으나 소련 내륙으로 끌려갔고, 1943년 결혼하며 아내의 성을 따랐다. 베를링 군의 정치장교를 거쳐 공안부에 들어가 국내군 체포와 1946년 국민투표 조작에 가담했다. 공안부 제10국 부국장으로 비에루트의 직접 지시를 받아 고무우카 등을 체포했다. 1953년 12월 5일 동베를린 출장 중 서베를린의 미군에 망명했고, 자유유럽방송으로 고문과 당내 투쟁을 폭로해 공안부 개편과 폴란드의 10월을 앞당겼다. 1994년 미국에서 죽었다.
원탁회의 합의문 서명 후 키슈차크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폴란드 국민이 승자다'라고 말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정치인으로, 1981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와 함께 계엄령을 기획·집행하며 연대노조 탄압을 주도했다. 1989년에는 정부 측 원탁회의 공동의장으로서 레흐 바웬사와 협상하여 연대노조 재합법화와 부분 자유선거의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한 후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연대의 거부로 불과 3주 만에 사임했고,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내각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잠시 머문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