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두샨 시모비치

Душан Симовић
유고슬라비아 국가기관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1882–1962 ○ 자연사

쿠데타와 패전 사이에 선 군인 총리

1918년 11월 자그레브에서 시모비치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 연대의 사상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했고, 이탈리아의 류블랴나 점거 시도를 세르비아군이 먼저 입성하게 함으로써 저지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공군 장군 출신으로,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를 이끌어 삼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군중의 환호 속에 총리가 된 군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집권 뒤에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못했고, 침공으로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다 1942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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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 1936–1938유고슬라비아 왕립 공군 사령관
  • 1938–1940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총참모장, 독일 침공 저항 주장 뒤 사임
  • 1941.03–1942.013월 27일 쿠데타 뒤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 겸 총참모장
  • 1941–1942런던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수반
  • 1945–1946베오그라드 귀환, 미하일로비치 재판 증인

누리야 포즈데라츠

Nurija Pozderac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 (보슈냐크계) 1892–1943 ✕ 전사

다민족 저항 연합을 대표한 보스니아 정치가

1941년 여름 우스타샤 지도자 크바테르니크가 카진으로 찾아와 협력을 권하자, 포즈데라츠는 그와의 면담 자체를 단호히 거부했다.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카진 지역의 교사 출신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다.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수십 명의 유대인 피란민을 구했고, 1942년 아브노이 부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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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대–1930년대카진 지역 교사
  • 1935유고슬라비아 왕국 의회 의원
  • 1941우스타샤 협력 거부,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2카진 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2아브노이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43네레트바·수체스카 전투 참가
  • 1944국민해방훈장 추서

이반 슈바시치

Ivan Šubašić
유고슬라비아 국가기관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1892–1955 ○ 자연사

왕정과 민족해방 세력 사이의 타협 정치가

그는 1944년 11월 베오그라드 협상에서 연립정부와 섭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군주제 문제를 전후로 넘겼다.

이반 슈바시치는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이자 변호사로, 전쟁 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초대 수반을 지냈다. 망명 왕정과 티토가 이끄는 민족해방운동의 세력 균형이 바뀌자 그는 양측을 잇는 비공산주의 협상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44년 티토와 협상해 아브노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연립정부와 섭정을 구상했지만, 군주제의 존속 여부는 전후 결정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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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유고슬라비아 의용군 복무 후 법학 공부
  • 1920년대브르보브스코에서 변호사 개업
  • 1938유고슬라비아 국민의회 의원, 크로아티아 농민당
  • 1939–1941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초대 수반
  • 1944.06–11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 총리
  • 1944.06비스 협정에서 티토와 협상
  • 1944.11베오그라드 협정 초안에 서명, 연립정부와 섭정 구상
  • 1945티토 정부 외무장관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Драгољуб Михаиловић

왕정 복고를 지향한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 지휘관

1941년 티토와의 협상에서 그는 총봉기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고, 두 저항운동의 결별은 곧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장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왕정과 세르비아 민족주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체트니크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41년 라브나 고라에서 점령군에 맞선 조직을 세웠지만, 전면 봉기보다 전후 권력 장악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하며 티토의 파르티잔과 충돌했다. 체트니크 일부와 그의 지휘망은 추축국 및 협력 세력과 협력했고, 이러한 선택은 다민족 유고슬라비아에서 운동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연합국의 지지를 파르티잔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후 그는 반역과 전쟁범죄로 처형되었고, 세르비아 대법원은 2015년 재판이 정치적으로 동기화되었다고 보아 판결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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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3세르비아군 사관후보생, 발칸 전쟁 참전
  • 1914–1918세르비아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35–1936불가리아 주재 군사 attaché
  • 1936–1939체코슬로바키아 주재 군사 attaché, 참모 장교
  • 1941유고슬라비아 제2군 참모장 대리
  • 1941–1945유고슬라비아 국내군 체트니크 지휘관
  • 1946반역·전쟁범죄 재판, 처형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Pavle Karađorđević

전쟁을 피하려다 추축국의 압박에 밀린 섭정

1941년 3월 25일 삼국동맹 가입 이틀 뒤 군부 쿠데타로 섭정직에서 쫓겨났다.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는 알렉산다르 1세 암살 뒤 미성년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통치한 섭정공이었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의 유산을 완화하고 크로아티아 민족운동과 타협하려 했으며, 1939년 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으로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유럽 전쟁이 확대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실질적 보장이 약해지자 중립을 지키려던 외교는 독일 압력에 대한 양보로 기울었고, 1941년 삼국동맹 가입은 군부 쿠데타와 그의 실각을 불렀다. 그는 전후 망명 생활을 하다 1976년 사망했고, 2011년 세르비아 법원에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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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 1912–1921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수학, 제1차 세계대전 복무
  • 1929베오그라드 현대미술관 설립과 후원
  • 1934–1939유고슬라비아 섭정평의회 의장
  • 1939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과 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추진
  • 1941삼국동맹 가입 뒤 군부 쿠데타로 실각

안드리야 헤브란그

Andrija Hebrang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1899–1949 ✕ 옥중 실종 · 사망 처리

혁명적 민족정치와 당 중앙집권 사이에 선 지도자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란그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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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5–1928자그레브 지방 당 조직 활동
  • 1941–1944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서기
  • 1943–1944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원
  • 1944–1946국가반파시스트평의회와 산업·무역 행정 담당
  • 1946–1948경제위원회 의장, 계획위원회 의장
  • 1948당에서 축출, 가택연금과 체포
  • 1949베오그라드 감옥에서 실종, 사망 처리

아르소 라디보예프 요바노비치

Арсо Радивојев Јовановић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몬테네그로 1907–1948 ✕ 의문사

파르티잔 전쟁을 조직한 참모 장교

1948년 8월, 루마니아로 향하던 국경에서 그의 전쟁 경력은 망명 시도와 함께 끝났다.

아르소 요바노비치는 왕립 유고슬라비아군 출신의 교육받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의 참모총장을 맡아 작전 지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이 되었지만,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결별에서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치적 고립에 놓였다. 루마니아로 탈출하려다 국경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와 후대 증언이 엇갈려 죽음의 경위는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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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8베오그라드 왕립 군사학교 하급과정 생도
  • 1932–1934왕립 군사학교 고급과정 수학
  • 1939『보병대대 전술』 출간, 보병학교 교관·지휘관
  • 1941몬테네그로 봉기 임시 최고사령부 사령관
  • 1942–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참모총장
  • 1945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
  • 1946–1948모스크바 보로실로프 고등군사학교 유학
  • 1948인포르비로 결의 지지, 루마니아 탈출 시도 중 사망

페코 답체비치

Пеко Дапчевић
유고슬라비아 국가기관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몬테네그로 1913–1999 ○ 자연사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 이어진 파르티잔 지휘관

1944년 10월 20일, 답체비치가 지휘한 유고슬라비아군과 소련군이 베오그라드에 입성했다.

페코 답체비치는 스페인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친 몬테네그로계 공산주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몬테네그로 봉기에서 출발해 사단과 군단을 지휘했고, 1944년 베오그라드 해방에서 소련군과 함께 작전한 제1군집단을 이끌었다. 1945년 제1군 사령관으로서 스렘 전선 돌파와 전후 군대의 정규화를 맡았으며, 훗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전투조직이 국가의 상설 군대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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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스페인 공화국군 국제여단 자원병, 중대 지휘관
  • 1941로브첸 파르티잔 분견대 사령관, 몬테네그로 봉기
  • 1942제4 몬테네그로 프롤레타리아 충격여단 사령관
  • 1942–1943제2 프롤레타리아 사단 사령관
  • 1943–1944제2 충격군단 사령관
  • 1944제1군집단 사령관, 베오그라드 작전
  • 1945–1949제1군 사령관, 이어 유고슬라비아군 총감찰관
  • 1953–1955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

페타르 2세

Petar II Karađorđević

망명 속에서 왕정의 정통성을 지킨 마지막 국왕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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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국왕 즉위, 섭정 아래
  • 1934–1941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 1941.03.27쿠데타 뒤 성년 국왕으로 선포
  • 1941.04–06추축국 침공 뒤 정부와 함께 망명
  • 1941–1945런던 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의 국가원수
  • 1944.09유고슬라비아 군인들에게 티토 합류를 호소
  • 1945왕정 폐지로 폐위
  • 1945–1970미국에서 망명 생활
  • 1970미국 덴버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