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추구린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Чугу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83–1947 ○ 1940년 체포, 사후 복권

비보르크 구 노동자 볼셰비키, 레닌에게 당원증을 건네다

1917년 4월 3일 밤 핀란드 역, 비보르크 구 위원회를 대표해 막 귀환한 레닌에게 당원증 제600호를 건넸다.

1905년 소르모보 봉기의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부였고, 1911년 레닌의 롱주모 당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7년 2월에는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의 핵심으로서 여성의 날 파업을 무장봉기로 밀어붙였다. 레닌 귀환 당일 핀란드 역에서 당원증 제600호를 직접 건넨 노동자 혁명가이며, 10월에는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에 있었고 내전기에는 제5군 정치국장과 체카 간부를 지냈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갔다가 병든 몸으로 풀려나 함석공으로 일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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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소르모보 공장에서 노동하며 RSDLP에 입당, 지하 혁명 활동 시작
  • 1905.12소르모보 무장봉기 지도 '5인조'의 일원으로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
  • 1911레닌의 롱주모 당학교 수학, 귀국 직후 체포되어 나림스키 변방 5년 유형
  • 1916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 RSDLP(b) 지하위원회 위원
  • 1917.02–102월 혁명에서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무장봉기 주도;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 위원
  • 1918–1919제5군 정치국장, 체카 간부회 위원 겸 서기, 체카 수송부장
  • 1921–1937크라스노예 소르모보 부소장, 북부 조선소 소장, '혁명의 엔진' 공장 소장 등 산업 지도자
  • 1940날조된 혐의로 체포, 수용소에서 병을 얻어 석방 후 함석공으로 생계를 이음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세레브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Серебр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8 ✕ 처형

"소비에트 록펠러"라 불린 바쿠 석유와 소련 금광의 재건자

1924년 크라신의 위임을 받은 아즈네프티 대표로서의 미국 방문에서 장비 구입과 함께 직접 교섭에 나섰다. 90세의 존 D. 록펠러는 한참 생각하더니 뜻밖에도 보증서 발급을 승낙했고, 차를 마신 뒤 숲 공원을 반 시간가량 빠르게 산책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글라브졸로토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존 리틀페이지 같은 미국 기술자를 영입해 금 생산을 늘렸으며, 이 금은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을 총괄했고, 1937년 9월 23일 체포되어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유죄 판결을 거쳐 1938년 2월 10일 처형되었으며 1956년 5월 19일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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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 (푸틸로프 공장 대표)
  • 1908–1911벨기에 망명; 브뤼셀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 1917–1918무역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9우크라이나 전선 군수보급 책임자; 중앙 포병공장 관리위원회 의장
  • 1920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0–1926아즈네프티(아제르바이잔 석유 트러스트) 이사회 의장
  • 1926소련 석유신디케이트(네프테신디카트) 이사회 의장
  • 1927–1930소련 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 1928–1937글라브졸로토(비철금속·금·백금 총관리국) 국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글레보프-아빌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Глебов-Ави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87–1937 ✕ 처형

첫 체신인민위원에서 로스트셀마시 초대 소장까지

1918년 6월 노보로시스크에서 흑해함대 정치위원으로서 독일군에 넘기느니 자침하라 명령했다. "정부가 세바스토폴로 가라는 무전을 보내도 그건 명령이 아니다."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905년 혁명기 칼루가, 모스크바, 우랄에서 지하인쇄소 활동을 벌인 직업혁명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첫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에서 체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볼셰비키 노동조합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따르는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로 나섰다가 해임되었고, 이후 로스트셀마시(로스토프 농기계공장)의 초대 소장(1929-1936)으로서 소련 공업화의 상징적 기업을 건설했다. 1936년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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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칼루가 인쇄소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
  • 1905–1907칼루가·모스크바·우랄 지하인쇄소 혁명활동
  • 1912–1914볼로냐 당학교 수학, 『프라우다』 협력
  • 1917.03–10페트로그라드 노조 중앙뷰로 서기, 군사혁명위 노조 대표
  • 1917.11–12초대 체신인민위원 (첫 인민위원회의)
  • 1918–1921흑해함대 정치위원, VTsSPS 간부, 우크라이나 노동인민위원
  • 1923–1926레닌그라드 노조평의회 의장, XIV차 대회 반대파 지도자
  • 1929–1936로스트셀마시 초대 소장

미하일 일리치 코시킨

Михаил Ильич Кош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40 ○ 폐렴

T-34를 낳고 폐렴으로 사라진 41세의 수석설계자

1940년 3월, 완성되지 않은 T-34 시제차 두 대를 직접 운전해 눈길 750km를 달려 크렘린에 도착했다. 스탈린 앞에서 시동을 걸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그는 귀환 후 폐렴으로 쓰러졌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과공장 견습생을 거쳐 30세에 공학을 시작한 소련의 탱크 설계자. 하리코프 공장에서 경전차 BT 계열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38년부터는 순수 궤도식 중형전차 A-32 프로젝트를 추진해 T-34로 발전시켰다. 1940년 3월, 미완성 시제차 두 대를 직접 몰고 하리코프에서 모스크바까지 눈길 750km를 주파해 크렘린 앞에서 스탈린에게 선보였으나, 그 무리로 폐렴에 걸려 41세로 사망했다. 그가 만든 T-34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소련 기갑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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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러시아 제국군 징집, 서부전선에서 부상
  • 1918–1921붉은군대 자원입대, 차리친·북부전선에서 전투
  • 1919RKP(b) 입당, 제3철도여단 당세포 서기
  •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졸업
  • 1924–1929뱟카에서 제과공장장·당 선전선동부장
  • 1929–1934레닌그라드 공과대학 기계공학 전공, 중형전차 변속기로 졸업
  • 1934–1936레닌그라드 키로프 공장 전차설계국, T-29·T-46-1 개발 참여
  • 1936–1937하리코프 183호 공장 KB-190 설계국장, BT-7 디젤 개량 완료
  • 1937–1939KB-24 조직,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 1939.12T-34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붉은군대 정식 채택
  • 1940.03하리코프-모스크바-하리코프 시제차 시험주행 직접 수행
  • 1940.09폐렴 악화로 사망, 후임 수석설계자 A. 모로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