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Karl Wilhelm Ferdinand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왕정·왕당파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신성 로마 제국) 독일 1735–1806 ✕ 아우어슈테트 전상으로 사망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낸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

1792년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자기 이름으로 선언을 내, 프랑스 왕실이 해를 입으면 파리와 주민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이자 프로이센군 원수였다. 1792년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고,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이른바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명의는 공작이었지만 문안은 망명 귀족 쪽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을 지키려던 이 위협은 파리에서 오히려 왕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는 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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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아버지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가 되었다.
  • 1792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으로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 1792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물러났다.
  • 1806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아우어슈테트에서 싸우다 치명상을 입고 11월 10일 오텐젠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II
왕정·왕당파 프로이센 독일 (프로이센) 1744–1797 ○ 재위 중 포츠담에서 사망

필니츠 선언에 서명하고 대프랑스 원정에 나선 프로이센 왕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했고, 1792년 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86년 숙부 프리드리히 2세를 이어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선왕의 계몽 통치에서 물러나 검열과 종교 통제를 강화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응해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대립을 접고,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선언을 냈으며 1792년 2월 정식 동맹을 맺었다.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으나 재정 부족에 묶였고, 조정은 폴란드 분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1795년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 강화를 맺었고 17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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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6숙부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했다.
  • 1791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을 냈다.
  • 1792–17932월 오스트리아와 정식 동맹을 맺고,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 1793–1795제2·3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를 얻었고, 1795년 4월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단독 강화했다.
  • 179711월 16일 포츠담에서 사망했다.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왕정·왕당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주국) 오스트리아 1747–1792 ○ 재위 중 빈에서 병사

필니츠 선언에 서명한 신성 로마 황제

1791년 8월 27일 프로이센 왕과 함께 필니츠 선언에 서명해, 다른 열강이 동참하면 프랑스 왕을 돕기 위해 함께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다. 1765년부터 토스카나 대공으로 개혁 정치를 폈고, 1786년 그곳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1790년 형 요제프 2세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함께, 다른 열강이 모두 함께할 때에만 프랑스에 개입하겠다는 조건부 선언을 냈다. 러시아와 영국이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형식적 선언이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선언은 프랑스 혁명 운동의 급진화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가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792년 3월 1일 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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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5–1790토스카나 대공(레오폴도 1세)으로 행정·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 1786토스카나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 1790형 요제프 2세가 죽자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었고,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대관했다.
  • 17918월 필니츠에서 프로이센 왕과 만나 프랑스 개입 용의를 밝힌 선언에 공동 서명했다.
  • 17923월 1일 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고, 아들 프란츠 2세가 뒤를 이었다.

이자크 르 샤플리에

Isaac Le Chapelier

동업조합과 노동자 단결을 금지한 르 샤플리에 법의 발의자

1791년 6월 14일 그의 발의로 채택된 법이 동업조합과 같은 직업의 노동자·고용주가 공동 이익을 위해 단결하는 것을 금지했다.

렌 출신 변호사로 1789년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다. 브르타뉴 클럽 창립에 참여했고, 1789년 8월 국민제헌의회 의장으로서 봉건제를 폐지한 8월 4일 밤 회의를 주재했다. 헌법위원회에서 1791년 헌법의 상당 부분을 기초했다. 1791년 6월 14일 그의 이름이 붙은 법이 채택되어 동업조합과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했고, 이 금지는 1864년까지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민중 결사의 공동 정치 행동을 제한하는 법도 제출했다. 푀양파와의 관계로 공포정치기에 혐의를 받아 1794년 4월 22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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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렌 세네쇼세의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고 브르타뉴 클럽 창립에 참여했다.
  • 17898월 국민제헌의회 의장으로 8월 4일 밤 회의를 주재했고, 9월 말 헌법위원회에 들어갔다.
  • 17916월 14일 르 샤플리에 법이 채택되었고, 7월 샹드마르스 학살 뒤 자코뱅 클럽을 떠나 푀양파로 옮겼다.
  • 17919월 30일 민중 결사의 공동 정치 행동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 1794체포되어 4월 22일 파리에서 단두대에 올랐다.

아드리앵 뒤포르

Adrien Duport

사법 개혁을 추진한 푀양파 정치가

«뒤포르가 생각하고, 바르나브가 말하고, 라메트가 행동한다»던 삼두파의 한 축으로, 1791년 푀양파 분열을 주도하며 혁명의 종결과 헌정 질서의 안정을 주장했다.

파리 고등법원 법관 출신의 국민의회 의원으로 배심제와 형사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바르나브·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고 1791년 푀양파 결성에 참여했다. 1792년 왕정 붕괴 뒤 망명해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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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8파리 고등법원 변호사로 인가받고 같은 해 고등법원 심사관으로 임명되어 1790년까지 재직했다.
  • 1787–17881787년 '애국자당'을 결성해 국민 의회 소집을 요구했고, 1788년에는 삼신분 구분에 반대하는 30인회를 세웠다.
  • 17895월 13일 파리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고, 6월 말 자유주의 귀족 47인과 함께 제3신분에 합류했다.
  • 1789–1791제헌의회에서 바르나브·알렉상드르 드 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고, 형사법위원회 보고자로서 1790년 3월 29일 사법제도 개편안과 1791년 2월 8일 배심제 도입에 기여했다. 1791년 2월 14일부터 26일까지 의회 의장을 지냈다.
  • 17917월 푀양파 분열에 앞장섰고, 9월 27일 유대인 완전 해방령을 주도했으며 24일 자유 유색인 권리 철회에 가담했다.
  • 17928월 10일 왕정 붕괴 뒤 센 형사재판소 소장직을 그만두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잉글랜드와 스위스를 거쳐 망명했다.
  • 1798용기병 반동 쿠데타(1797년 9월 4일) 이후 다시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가이스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앙투안 바르나브

Antoine Barnave
푀양파 왕정·왕당파 프랑스 프랑스 1761–1793 ✕ 처형

입헌군주제를 지키려 한 푀양파의 중심 연설가

1791년 7월 15일, 국왕의 불가침성을 옹호하며 “우리는 혁명을 끝내려 하는가, 다시 시작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왕정이, 평등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소유가 파괴된다고 경고했다.

제3신분 대표로 국민의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뒤포르·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다. 바렌 도주 뒤 입헌군주제를 지키려 푀양파를 이끌고 왕실과 비밀 교섭했으며, 왕실 문서가 발견된 뒤 반역죄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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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그르노블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신분 통합과 머릿수별 표결을 주장했다.
  • 1790제헌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그르노블 시장이 되었다.
  • 1791바렌에서 왕 일가를 파리로 호송한 뒤 푀양파를 결성하고 국왕의 불가침성을 옹호했다.
  • 1792–17931792년 8월 국민의회에서 고발되어 그르노블과 포르바로에 수감됐고, 혁명재판소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793년 11월 파리에서 처형됐다.

장 샤를 피슈그뤼

Charles Pichegru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프랑스 프랑스 1761–1804 감옥에서 사망, 자살 · 타살 논쟁

프랑스 혁명전쟁의 장군, 반혁명 음모자

1794년 2월 북부군 사령관이 되어 플뢰뤼스 전투에 참여했고, 1794년 12월–1795년 1월 얼어붙은 강을 건너 위트레흐트와 암스테르담에 입성했는데, 이때 프랑스 경기병이 얼음 위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사로잡았다.

1778–1804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 프랑스 혁명전쟁 프랑드르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라인 전선에서 싸웠다. 이후 왕당파로 돌아섰고, 1797년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에서 카옌으로 유배되었으며, 런던으로 도피한 뒤 1799년 코르사코프의 참모로 복무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나폴레옹에 대한 왕당파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804년 4월 감옥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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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3제1포병연대에 입대, 미국 독립전쟁에 잠시 참전
  • 1793여단장, 이어 사단장으로 진급해 라인군 사령관이 되었다
  • 1794북부군 사령관으로 취임,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전역을 지휘
  • 179512 제르미날 봉기를 진압하고 '조국의 구원자' 칭호를 받았다
  • 1797오백인회 의원이 되었고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로 카옌에 유배
  • 1799코르사코프의 참모로 복무
  • 1804왕당파 음모 연루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