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외무장관직 사임과 탈당을 선언했다. 일부 기록은 이 연설을 12월 21일로 적어 날짜가 엇갈리며,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28년 그루지야 마마티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5년 그루지야 내무장관을 거쳐 1972년 당 제1서기가 되어 대규모 부패 단속과 아바샤 실험을 벌였고, 1985년 외교 경험 없이 소련 외무장관에 발탁되어 군축과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을 협상했다. 1990년 12월 20일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며 사임했고, 1992년 조국으로 돌아가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으로 2003년 장미혁명 때까지 이끌었다. 2014년 7월 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1989년 4월 9일, 그는 트빌리시 독립 시위의 조직자로 체포되었지만 45일 뒤 대중의 압력으로 풀려났다.
메라브 코스타바는 음악가·시인이자 그루지야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싸운 반체제 운동가였다. 그는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와 함께 지하 출판과 헬싱키 인권운동을 조직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민족·종교 억압에 맞섰다. 장기간의 수감과 시베리아 유배 뒤 1987년 귀환한 그는 1988년 이후 대중적 독립운동과 트빌리시 시위를 이끌었다. 1989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루지야는 그를 민족영웅으로 기렸다.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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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