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타바 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내전에 참가했고, 본래 성 하일로를 1925년 디브로바로 바꾸었다. 정치장교로 일하다 1940년 발트 특별군관구 군사회의 위원이 되었고, 독소전쟁 초기의 패배로 북서부 전선 군사회의 위원에서 물러났다. 볼호프 전선의 제59군과 제2충격군 군사회의 위원을 거쳐 1944년 제145소총사단장으로 비텝스크-오르샤 작전과 리가 작전에 참가했다가 중상을 입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베를린 소련 지구 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6월 17일 봉기 때 동베를린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 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일하다 1960년 퇴역했고, 1971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정치국에서 스탈린이 유리 즈다노프에게 던진 말: "뭐라고, 리센코가 우리 농업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모르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이자 스탈린의 사위였던 유리 즈다노프는 1947년 28세의 나이로 중앙위원회 과학부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기 과학 정책의 핵심 관료가 되었다. 1948년 4월, 리센코의 이론을 공개 비판하는 강연으로 스탈린의 분노를 샀고, 정치국에서 질책을 들은 뒤 《프라우다》에 굴복의 편지를 발표해야 했다. 1950년에는 유대인 과학자들을 겨냥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가담했으나, 스탈린 사후 로스토프 국립대학 총장(1957–1988)으로 31년간 재임하며 이 지방대학을 소련 최상위권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800여 편의 논문을 남겼고, 말년에는 북카프카스 과학센터를 이끌며 과학행정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