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바실리 필리포비치 마르겔로프

Василий Филиппович Марге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08–1990 ○ 자연사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 VDV를 중무장 타격군으로 변모시킨 사령관

1973년 세계 최초의 BMD-1 승무원 탑승 낙하산 강하 시험에서 아들 알렉산드르를 지켜보며, 마르겔로프는 실패 시 자결할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바실리 마르겔로프는 소련 공수군(VDV)을 23년간 지휘하며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군사 지도자다. 1944년 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정예 장교로, 1954년 VDV 사령관 취임 후 경보병이던 공수군을 중무장 기동타격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주도로 BMD-1 공수장갑차, 중량물 투하 플랫폼, 켄타브르·레악타브르 승무원 탑승 강하 시스템이 개발되고 An-22·Il-76 대형 수송기가 도입되었다. 65세까지 60회 이상 직접 낙하산 강하를 수행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시 VDV 작전을 지휘했다. 퇴역 무렵 VDV는 소련군 최정예 부대로 '바샤 삼촌의 군대'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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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5제49근위소총사단장 (드네프르 도하, 헤르손 해방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8–1950제76근위공수사단장 (프스코프)
  • 1950–1954제37근위공수군단장 (극동)
  • 1954–1959소련 공수군(VDV) 사령관 (1차 재임)
  • 1959–1961VDV 제1부사령관 (강등)
  • 1961–1979VDV 사령관 (2차 재임, 전면적 현대화 주도)
  • 1979–1990국방부 감찰총감단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그로미코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Громы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09–1989 ○ 자연사

「미스터 니예트」, 마지막 수로 개혁가를 추천하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체르넨코가 죽은 이튿날, 그로미코는 고르바초프가 회의를 열자 곧바로 일어나 그를 총서기로 추천했다. 그에게 돌려진 '미소는 상냥하지만 이빨은 강철'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해졌지만, 공개된 회의 기록에는 없다.

28년간 외무장관을 지내며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외교에 입문한 1939년 이후 대숙청으로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며 올라 1943~1946년 주미 대사, 유엔 초대 상임대표를 지냈다. 1940년대 말부터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20여 차례 행사해 '미스터 니예트'로 불렸고,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1973년부터 정치국 정회원이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의 정치적 책임을 함께 졌다. 1985년 3월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를 총서기로 추천했고, 1988년 건강을 이유로 은퇴한 뒤 198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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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30대의 워싱턴 주재 대사
  • 1944–1945덤바턴오크스·얄타·샌프란시스코: 유엔 창설 실무
  • 1957–1985외무장관 28년
  • 1962쿠바 위기의 협상 창구
  • 1970년대데탕트 조약들의 서명자
  • 1985–1988고르바초프 추천, 명목상 국가원수로 이동, 1988년 사임

이반 이그나티예비치 야쿠봅스키

Иван Игнатьевич Якуб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1976 ○ 병사

바르샤바조약군을 9년간 지휘한 벨라루스계 원수

1941년 민스크 방어전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부대는 시가로 밀려든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의 여섯째로 태어나 1932년 적군에 입대해 1934년 민스크의 칼리닌 벨라루스 통합군사학교를 졸업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 방어전, 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싸워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소련원수에 올라 바르샤바조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군사 준비를 총괄했으나, 작전 개시 직전 현장 지휘권은 이반 파블롭스키에게 넘어갔다. 1976년 11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사망해 유해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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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폴란드 동부 진주·겨울전쟁에 전차중대장으로 참전
  • 1941–1945독소전에서 전차대대장에서 근위전차군단 부사령관까지, 두 차례 소련영웅 수훈
  • 1948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 1960–1961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 1962–1965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 (1961년 8월부터 코네프의 부사령관으로 실무 주도, 1962년 4월 복귀)
  • 1965–1967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7–1976국방 제1차관 겸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 소련원수

바실리 필리모노비치 샤우로

Василий Филимонович Шаур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2007 ○ 은퇴 1986

21년간 소련 문화의 당 문지기로 군림한 '위대한 무언가'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브레즈네프 체제 21년간 중앙위 문화부장으로서 어떤 문학·영화·음악이 소련 대중에게 닿는지를 결정한 문화의 당 문지기였다. 벨라루스 교사 출신의 그는 보수 진영의 지지를 업고 1973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중앙위에서 몰아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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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 1965–1986중앙위 문화부장
  • 1986연금 은퇴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아브라시모프

Пётр Андреевич Абрасим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2–2009 ○ 자연사

냉전 베를린을 관리한 소련의 '통치 대사'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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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소련 각료회의 상임대표
  • 1948–1950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0–1952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2–1955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7–1961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61–1962스몰렌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71주동독 소련 대사 (1차)
  • 1971–1973주프랑스 소련 대사 (마다가스카르 겸임)
  • 1973–1975CPSU 중앙위원회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 1975–1983주동독 소련 대사 (2차)
  • 1983–1985소련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
  • 1985–1986주일본 소련 대사

키릴 트로피모비치 마주로프

Кирилл Трофимович Мазу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4–1989 ○ 자연사

파르티잔 출신 벨라루스 지도자, 브레즈네프 정치국원 겸 연방 부총리

오늘날 내가 같은 작전을 지휘하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체코인들에게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다.

벨라루스 파르티잔 지도자로 1956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65년부터 소련 정치국 정위원 겸 제1부총리로 13년간 경제를 총괄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정치감독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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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6파리치 지역 도로부 기술자, 고멜 자동차도로기술학교 졸업
  • 1936–1938붉은 군대 복무, 이후 벨라루스 철도 정치부 근무
  • 1940–1941고멜 시 콤소몰 비서 → 브레스트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2–1943중앙유격대본부 대표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 지도 (중령 → 대령)
  • 1943–1947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49–1950민스크 시당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50–1953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3–195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5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
  • 1965–1978CPSU 정치국 정위원 겸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입 작전 현장 정치감독관
  • 1986–1989전연방 전쟁·노동 재향군인회 초대 의장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지먀닌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Зимян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4–1995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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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

티혼 야코블레비치 키셀료프

Тихон Яковлевич Кисел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7–1983 ○ 암

벨라루스 20년 총리에서 당 제1서기로 올랐다가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실무자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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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옐스크 지역 중학교 벨라루스어·문학 교사
  • 1941–1944스탈린그라드주 크라스냔스크 학교 교장 (대피)
  • 1944–1952고멜 주당위 지도원 →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2–1955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5–195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59–1978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78–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3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후보위원

표트르 미로노비치 마셰로프

Пётр Миронович Машер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18–1980 ✕ 교통사고

벨라루스 파르티잔 영웅에서 산업화를 이끈 15년의 지도자

스스로 알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도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수학·물리 교사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여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65년부터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로 15년간 재임하며 민스크 메트로, 대규모 화학공장, 브레스트 요새·하틴 기념관을 추진하여 전후 농업 공화국을 소련의 첨단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치국 후보위원(1966–1980)이자 코시긴 개혁을 지지한 실용적 개혁파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코시긴의 후임 각료회의 의장으로 유력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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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로소니 중학교 수학·물리 교사
  • 1941–1942로소니 지하 콤소몰 조직 책임자
  • 1942–1943파르티잔 분견대 '쇼르스' 지휘관 (호출부호 '두브냐크')
  • 1943–1944로코솝스키 파르티잔 여단 정치위원, 빌레이카 지하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7–1954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55–1959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9–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65–1980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0CPSU 정치국 후보위원

예브게니 필리포비치 이바놉스키

Евгений Филиппович Иван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벨라루스 1918–1991 ○ 자연사

NATO와 맞선 소련 최전선 전력을 8년간 지휘한, GSFG 최장 재임 사령관

1941년 12월 4일, 독일 전차 부대가 서부전선군 사령부를 포위하기 직전 — 대위 이바놉스키가 지휘하는 27전차대대가 돌파구를 막아 사령부를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령으로 시작해 26세에 대령으로 종전한 전차 장교로, 모스크바 방어전부터 동프로이센까지 종군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을 역임하며(역대 최장인 8년간) 바르샤바 조약기구 최정예 전력을 지휘해 냉전기 NATO와의 군사적 대치 최전선을 책임졌다. 이후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85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말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대조국전쟁과 전후 군사력 건설의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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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전차 소대장 · 중대장, 모스크바 군관구
  • 1939–1940서부 벨라루스 진주 및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1945전차대대 참모장·대대장, 2전차군단 정찰부장·작전부장, 62근위중전차연대장 (서부·브랸스크·보로네시·제1·제2벨로루시 전선군)
  • 1946–1952근위기계화군 정찰부장 · 전투훈련부장
  • 1952–1953벨로루시 군관구 기갑·기계화부대 부사령관 (자주포)
  • 1953–1956기계화사단 참모장 → 전차사단장, 벨로루시 군관구
  • 1958–1961극동 군관구 제1부참모장
  • 1961–1965제1근위전차군 사령관, GSFG
  • 1965–1968모스크바 군관구 제1부사령관 → 사령관 직무대행
  • 1968–1972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72–1980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
  • 1980–1985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85–1989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89–1991국방부 감찰총감단

유리 이바노비치 드로즈도프

Юрий Иванович Дрозд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25–2017 ○ 자연사

KGB 불법정보국을 12년간 지휘한 소련의 전설적 첩보장교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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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붉은 군대 복무, 제1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 입성
  • 1945–1952주독 소련군 및 발트 군관구 포병장교
  • 1952–1956군사외국어대학 졸업, 독일어·영어 전공
  • 1956–1957KGB 전입, 불법정보요원 훈련
  • 1957–1963동베를린 KGB 연락장교, 슈타지와 협력하며 불법요원으로 활동
  • 1964–1968KGB 베이징 주재원 (문화대혁명 시기)
  • 1968–1975PGU 중앙기구 근무, S국 부국장
  • 1975–1979KGB 뉴욕 주재원, 유엔 소련 부대표로 위장
  • 1979–1991PGU 부국장 겸 S국장 (불법정보 총괄), 빔펠 창설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코즐롭스키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зл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벨라루스 1929–2022 ○ 자연사

소련 지질학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

다른 사람들은 자식을 대사관에 두는데, 왜 아들을 알단으로 보냈냐는 질문에 — 「7년 후에 그 현장 학교를 거친, 진짜 지질학자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예브게니 코즐롭스키는 소련 지질학의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1975–1989)으로, 재임 기간 소련의 광물자원 기반을 두 배로 확장하고 서시베리아·카스피·중앙아시아에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다. 달동 출신으로 부시추조수에서 출발해 극동 솔네치노예 주석광산의 조기 탐사를 성공시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과학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콜라 초심층 시추는 12,620미터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고, 소련은 400척 규모의 지질탐사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광물자원 정책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지질학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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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5극동지질관리국: 부시추조수 → 주임기사 → 콤소몰스크 탐사대장
  • 1965–1973러시아공화국 지질부 기술관리국장
  • 1973–1974전연방 광물자원경제·지질탐사연구소(VIEMS) 소장
  • 1974–1975소련 지질부 차관
  • 1975–1989소련 지질장관
  • 1990–2009모스크바 지질탐사대학(MGRI) 교수·학과장
  • 1992–2022국제지질주식회사(MAKGO) 사장

스베틀라나 알렉산드로브나 알렉시예비치

Свя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яксандраўна Алексіевіч
벨라루스 벨라루스계 1948–

증언의 목소리로 소비에트 세기를 기록한 작가

“나는 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문학적 방법을 찾아 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이자 기자로, 러시아어로 전쟁과 사회적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 집단적 기억의 문학을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아연 소년들》에서 공식 영웅담이 가린 여성과 병사의 경험을 드러냈고, 《체르노빌의 기도》에서는 1986년 재난 뒤 생존자와 유가족, ликвидатор들의 목소리로 기술 재난의 인간적 결과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업은 사실의 기록과 문학적 구성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를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았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65–1967학교 교사와 지역 신문 기자
  • 1972벨라루스 국립대학교 저널리즘 학위
  • 1973–1976《농촌신문》 기자
  • 1976–1984잡지 《뇨만》 논픽션·수필 부문 책임자
  • 1985《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출간
  • 1989《아연 소년들》 출간
  • 1997《체르노빌의 기도》 출간
  • 2015노벨 문학상 수상